늙호박 한 덩이
- 김정원作
늙호박 한 덩이
거실에 모셨네
낯선 집에 와서도
퍼무져앉아 한가로이 평화롭다
미모도 아닌 것이
몸매도 그런 것이
언제나 흐뭇한 얼굴 온화한 화색 돌고
눈길 한번에도 한 바가지 정을 준다
수시로 눈 맞추는 날은
하루가 그득하고 평안하다
넌들 긴 여름 지나 소슬바람에
아픈 날 없었으랴
가을의 총합
잘 영근 열매의 은혜여
생의 끝말이
너 같아라
[시인 이오장 시평]
당장 뛰쳐나가 늙은 호박 한 덩이 구해다가 거실에 모실 일이다.
김정원 시인같이 호박을 모셔두고 호박의 아름다움과 농익은 참맛을 즐길 일이다.
어렸을 때 농부의 아들로 살 때는 너무 많아 처치 곤란했고 한겨울을 호박죽으로 견디며 살 때는 고구마와 더불어 가장 먹기 싫은 음식이 호박이었다.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호박을 대했다.
풋호박일 때는 된장국이나 나물로 먹었을 테고 덜 익은 것은 여물에 넣어 소를 먹였던 호박, 농촌의 봄날은 언덕이나 빈터에 호박심기가 큰일이었다.
호박이 없는 집은 남의 집에서 얻어다 먹기도 했고 허락 없이 따와도 누가 별말을 하지 않았던 우리의 식량이었다.
그런 호박이 김정원 시인의 눈에 들어 거실에 단정하게 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한가하고 평화로워 볼 때마다 흐뭇하게 웃는다.
미모도 별로다.
몸매는 아주 못났다.
그러나 웃음을 주고 정을 가득 준다.
집안에 평화와 행운을 저절로 준다.
움직이지 않고도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 호박도 긴 여름 장마에 뿌리가 뽑혀 간신히 살아났고 땡볕에 잎이 시들시들 말라 목마른 넝쿨이 담벼락에 축 늘어져 위태위태할 때가 있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 얻어진 아름다움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생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
고통을 이긴 육체가 편안함도 아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 얻은 늙호박 하나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삶의 참맛을 느꼈다.
오죽했으면 생의 끝말이 호박 같으라고 기원하겠는가.
단순한 호박 하나로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친 시인의 심성이 부럽다.
[전국매일신문 詩] 시인 이오장(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