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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고장 난 한국사회의 민낯을 바로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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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고장 난 한국사회의 민낯을 바로 마주해야 한다
  •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 승인 2022.03.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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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세계 선도국가가 되기 위한 조건, 인류의 공존

고장 난 현실을 외면하는 사회는 오늘의 일본이 된다. 80년대 일본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미국을 위협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엔화 절상 합의와 버블경제로 추락하였다. 당시 선진 기술로 무장한 일본경제는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엔화절상과 유동성자금의 증가는 부동산 가격거품과 주가버블로 이어졌고 엄청난 국가자산버블로 그 대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했다. 토건업자들과 밀착하고 있던 보수정권은 경기부양을 위해 지속적으로 재정지출을 하였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었으며 개혁을 위한 시간만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산버블이 해소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또한 이러한 경기부양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재정구조는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일본의 경제체질을 약화시키고 저성장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일본만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전 세계에 경제정책의 부정적 사례로 연구되는 대상이 되었다.

일본을 연구한데 있어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경제적인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었고 이제는 30년을 말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로 한때 경제가 살아나는 듯 하였으나 사회구조적인 복합적인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비효율적인 행정체제, 정경유착에 의한 고질적인 부패, 극우세력에 기대어 유지되는 권력구조, 사회전반에 걸친 폐쇄적인 조직구조, 과거지향적인 국민정서, 정치와 언론의 결탁, 자국중심주의, 기술혁신의 부재 등이 그것이다. 엔화를 무수히 찍어 디플레이션을 유도하고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였으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 재정적자만을 심화시키고 있다. 일본 내 경제학자들조차 향후 2025년 이후 만성적인 마이너스 성장에 빠져들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을 지독히 싫어했음에도 과거에는 배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심지어 자민당을 흉내 내어 내각제를 도입하고 자민당의 정치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던 정치세력들도 존재했다. 이는 권력이 집단화하고 거대 양당체제를 계속하여 유지하려는 집단권력의 수단으로 지금도 고려되고 있는 사안이다. 대부분 우리가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우리의 것으로 발전시켰지만 잔존하고 있는 폐해는 지금도 상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체계이다. 일제 강점시대의 사법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검찰과 검찰의 별건수사의 남용과 기소중심 수사의 관행, 구속수사 원칙, 패쇄적인 조직 구조, 권위주의, 기수문화 등 사법기관의 관행적 행태는 지금도 존재한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도 숙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보여주는 학계와 교육계의 패쇄적 구조는 분명히 타파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새로운 역사인식의 수용과 교육현장에서의 교과과정에 대한 혁신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해방 이후 만들어져 지금도 교육되어지는 영어문법이 아직도 그대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는 수학교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일본의 교재를 대부분 번역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고 지금도 이러한 교과과정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서열화 된 사회를 위해 변별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교과목과 교과과정을 지금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대학입시에서 서열화를 만들어 변별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아직도 이용되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교육의 실현은 구호로만 실현되지는 않는다. 아직도 계급사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구의 제도를 따라갈 이유도 없다. 교육수준이 계급을 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처럼 입시지옥을 만들고 있는 동양적 전통을 더 이상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더 이상 계급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바이고 사회에 실제 존재하는 있는 계급의 그림자를 지운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나아가는 진정한 현실목표이다. 교육을 통해 누구나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사회적 계급이 없이 평등한 위치에서 각 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교육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제는 세계에서 모범된 민주국가로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현실은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뒤쳐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개혁은 형식에 있지 않다. 정당정치를 실현하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다. 절대왕정에 대립한 부르조아와의 타협의 산물인 점을 감안하면 정당구조의 민주화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우리의 정치개혁은 정당 민주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거대 양당이라고 칭하는 국민의 당원참여가 권리나 책임이 없는 일반당원을 제외하고 산정하면 150만 명 수준이다. 정권창출 여부에 따라 여야의 당원 수 증감이 50만 명 이상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탄핵직후 20만 명으로 급감하기도 하였다.

정당정치의 본질은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고 국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서구의 발전한 민주정치도 사실상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세계 모든 나라는 형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 봉건주의적이며 태생적인 한계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앙당 중심의 권력구조에 있다. 중앙당이 공천권을 놓으려 하지 않고 지역 국회의원은 기초의원의 공천권한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또한 정치신인의 발굴이 인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적정한 정치학습과정과 절차도 없이 폐쇄적 정치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유럽의 청소년 캠프 등을 통한 인재육성과 정치에 대한 최선의 봉사로서의 가치를 심어주는 일련의 과정이 한국정당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재양성만이 교육의 최고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편교육의 바탕 위에 다양성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정신을 습득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이를 통한 합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다양한 선택 기준에 의해 전문적 영역의 심화된 학습이 다양하게 이루지고 이를 통해 인재육성에 대한 자연스런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인재가 경쟁을 통해 줄을 세워 스스로 인재임을 각성시키는 자부심만으로 만들어 질 수는 없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분야별 전문화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일률적인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도장을 찍기 위해 도장 찍는 기계를 만드는 일본의 변태적 퇴행성과 다르지 않다.

한국 언론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과거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언론권력을 만든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당시 권위주의 정부와 결탁된 언론권력은 경제, 사법, 행정에 이르는 사회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횡포에 가까웠다. 민주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그러한 권력적 탐욕도 사라지는 것 같았으나 인터넷 언론의 확대는 엘로우 저널리즘을 한층 더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사회갈등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자극적 기사와 제목을 선택하며 인터넷 포털 상위에 올려놓기 위한 검색순위와 돈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선정성을 수단으로 언론기업이 형성되고 정치권력과 자본이 결탁한 옐로우 저널리즘 현상이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보도가 생명인 언론이 상품홍보물을 만드는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비교적 빈곤 계층이 많이 사는 정체 지역에 진입해 낙후된 구도심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기존의 저소득층 주민을 몰아내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화가,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액세서리 디자이너, 목수, 사진작가, 인디밴드 등이 모여 독특하고 예술적인 공동체 문화를 만들었던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과 망원동, 상수동,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경복궁 옆 서촌, 경리단길, 성수동 등 이른바 핫 플레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카페 등이 유명해져 유동 인구가 늘어나자 가맹점을 앞세운 기업형 자본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임대료를 높여 가난한 예술가나 기존 거주자들을 몰아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서울에서 지역 기반의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전반적인 부동산 정책의 실패와 임대차보호법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법률의 허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자랑하고 이를 아직도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노포이다. 노포는 대대로 물려 내려져오는 점포를 이른다.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100년 이상은 기본이고 500년 심지어는 1000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점포도 존재한다. 일본의 노포문화는 에도 막부시대이래 일본의 사회구조와 관련이 있다. 중상주의 정책을 일찍이 받아들여 계급화 되고 분업화되어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일본의 백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점포를 세습화하는 행위는 강제된 관리수단의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세기 말 명치유신 이후 사회적 변혁의 과정에서 노포를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점포의 운영에 대한 임대차 권리의 대부분을 점주에게 귀속시켰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점포에서 임대인을 쫓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OECD 중 산재사망률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산업화과정에서 사용자 중심의 노동환경이 고착화된 결과이다. 산재 사망으로 인한 사업주의 경우 법률에 의해 받는 벌금이 불과 500만 원에 불과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는 공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21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공포되었고 상시 종업원수의 기준에 따라 적용시기를 달리하지만 5인 미만의 사업장은 예외가 된다. 사망자 1명이상이 발생한 경우 사업주가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고 2명 이상 6개월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의 벌금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업자의 생태를 현실적으로 감안한다면 징역형보다 100억 수준의 벌금을 규정하는 방안이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5인 미만의 사업장기준은 모든 법률에서 사라져야 한다. 5인 기준이 영세사업장의 기준이 되고 있으나 이는 사업자를 5인 이하로 쪼개어 실질 운영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이는 매출기준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5명 이하를 기준으로 정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권위주의 시대 행정의 유산으로 그냥 직감으로 정한 개념이다. 또한 일명 바지 사장을 내세우는 경우도 증가 한다. 이는 불법 증여의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세금을 포탈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기업의 운영과 모든 투자는 실명으로 이루질 수 있도록 기업에 대한 제반활동에 있어 차명금지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기업을 여러 가지 이유로 쪼개어 운영하더라도 단일 사업의 대한 매출액의 기준은 이를 합한 것을 기준으로 모든 법률을 적용하는 기준도 마련되어야 한다.

이외 우리가 직면한 현실도 바로 보아야 한다. 망국으로 걱정할 정도의 심각한 출생률, 장기대책이 없는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집단 이기주의와 지역 이기주의, 해묵은 사회갈등, 새롭게 등장하는 인권문제, 오랜 경쟁사회가 빚어놓은 합의문화의 부재, 정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청년실업, 복잡한 항목만을 늘려놓으며 복지행정의 행정력만을 낭비하고 있는 사회안전망 구축, 합법화된 막대한 국가 이권사업의 정치세력의 집단적 개입, 양극화된 정치권력투쟁으로 인한 국책사업의 연속성 부재, 부동산 불로소득의 반복 등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문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스스로 함몰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앞을 향하고 있을 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는 국민 모두에게 필요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대안이다.

국민의 집단지성이 꿈을 꾸고 자긍심으로 가득찬 국민이 된다는 것. 우리가 바로 바라보아야 하는 고장 난 한국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사회 갈등해결을 위한 화합과 통합의 정신과 함께 해야 하고 자신이 서 있는 땅만을 보고 있는 시각은 관용을 마음에 품을 수 없음도 알아야 한다. 국민의 집단지성은 앞을 바라보고 그 목표가 분명할 때 발휘된다. 인류 역사를 재창조하고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 한다는 실천적 신념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waterwrap@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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