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은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의 19번째인 가을의 마지막 절기다. 올해는 오는 23일에 들었다.온도가 이슬점 아래로 내려가면 지표에 가까운 대기 중의 수증기는 이슬이 되고, 영하로 내려가면 서리가 된다.해발 865m의 대관령일대에 최근 새벽 최저기온이 1도5분까지 떨어지면서 올들어 첫서리가 내렸다. 중앙관상대 강릉지대에 따르면 올해 첫서리는 예년보다 5일, 작년보다는 10일 빨리 내린 것으로 이날 아침기온은 예년에 비해 6도4분이나 낮았다.이번 첫서리는 지난 2000년 이후 가장 빨리 관측된 것으로 파악된다.
서리가 내리면 뭇 수풀이 시든다. 나뭇잎도 엽록소를 잃고 적갈색으로 변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이런 변화를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붉다’고 표현했다. 서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민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된서리’가 ‘타격을 크게 받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서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데 반해 서릿발은 밑에서 위로 솟는다. 땅속 수분이 얼면서 얼음조각이 흙을 밀어 올리므로 식물을 뿌리부터 상하게 한다. 그래서 서릿발의 피해가 더 크다.
서슬 퍼런 추궁이나 엄한 명령을 ‘추상(秋霜:가을 서리)같다’고 말한다. 서릿발 같다고도 한다. 무소불위의 칼날 앞에서는 모두가 서리 맞은 나뭇잎처럼 엎드린다. 권세가 강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엄혹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 같이 대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세태와 정치판을 보면 더 그런 것 같다.
채근담(菜根譚)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 봄바람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의미다. 진짜 위엄 있는 ‘제명(帝命: 제왕의 명령)’은 ‘추상’이 아니라 ‘춘풍’에서 나온다. 청와대도 ‘춘풍추상’ 글귀를 내걸었지만 구호와 실천의 간극은 넓어 보인다.
“초목을 말려 죽이는 건 서리이다. 서리로 생물을 말리는 건 생명을 준 신이 그걸 거둬들이는 거다. 서리는 사람에게도 내린다. 염병은 일반 백성에게 내리는 서리이고, 옥사(獄事)는 사대부에게 내리는 서리다. 흉년이 드는 건 나라의 절반에 내리는 서리이고, 전란(戰亂)은 온 나라에 내리는 서리이다. 교만하고 방탕한 자는 스스로 서리를 재촉한다.”
조선 후기 문신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 중 ‘서리’의 한 토막이다. 질병은 백성의 걱정거리이고, 옥사는 지체 높은 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일이란 것. 흉년도 두렵지만 전란은 치명적이란 경구는 오늘에 더욱 무겁다. 교만과 방탕을 경계하는 문장 아닌가. 머리가 희어지는 건 백성의 서리지만, 비리로 감옥 들락거리는 꼴은 사대부의 서리란 말이 새삼스럽다.
나라 절반에 내리는 흉년 서리는 경제난임에 분명하겠고, 온 나라가 맞을 서리는 전쟁이란 건 삼척동자도 알 만하다. 성대중은 서리를 하늘이 내리는 경고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경제난과 전쟁 대비에 교만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으며 신중한가. 염려라도 하며 사는가.
매번 그렇듯 지면의 첫서리 상고대 사진 한 컷에 눈길이 멎어 또 한 해가 이울고 있는가, 싶어진다. 이틀만 있으면 서리를 앞세우고 오는 상강 절기. 희끗한 발모(髮毛)는 더욱 희어지리라. 허연 서리 앞에, 세어가는 머리카락에 더 겸손해져야겠다.
10월 일찍 내린 서리를 보면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쇠락의 계절 너머 희망의 씨앗은 어디쯤서 자라고 있을까. 윤동주 시인은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라고 썼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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