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익의 시선] 우리 민족과 공동체주의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사실 공동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꿈을 담고 있다. 같은 하늘과 같은 땅을 공유하고 있는 이유로 서로가 함께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래된 정서이다. 그러나 현실은 생존을 위한 서로의 경쟁을 피부로 느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명분을 만드는 수단으로만 전락하기 쉽다. 인류의 역사에서 집단공동체의 필요성은 외부의 침략적 요소에 방어의 수단으로 유지되었고 이러한 집단의식 안에서 개개인은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여온 셈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이 발생하는 이유가 되었다.
우리사회는 필요한 재화가 넘칠 만큼의 풍요한 시대를 만들고 있다. 동 시대의 가난한 나라의 처참한 상황이 그야말로 남의 일이 된 것이다. 6·25 전쟁으로 모든 생활기반이 초토화되어 가난을 몸으로 겪었던 세대가 지금도 생존하여 과거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한 국가의 급속한 발전은 그 속에 살고 있던 구성원인 우리들이 민족 잠재력의 역량을 유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대중을 지배하여 통제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이 대두되고 현대의 사상적 중심을 이루게 되었으나 이러한 정치권력의 속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세계2차 세계대전이후 독립한 국가들이 강대국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국경을 만들게 된 것이 이질적인 민족 간 내전이 계속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동서냉전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며 사회주의 혁명이 신생독립국을 휩쓸었던 것도 가난을 만든 이유가 되었다. 경제적 종속과 정치권력의 부패 등 현재의 저개발국가가 처한 여러 문제를 설명하는 다른 이유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이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모든 대내외적이고 극단적인 저해 요소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의 모델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혹자는 특정한 지도자가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돌이켜 보면 군사정권 이후 탄생한 민주정부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사실도 없었다. 그리고 대선을 치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지도자는 항상 국민 대다수의 비난 대상이 되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한 정치의 혐오 속에서도 오늘날 G7의 지위에 접근한 우리나라의 현 위치와 모든 영역에서 지속적인 발전이 유지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그 요인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사실상 우수한 국민의식과 실용적 전통문화가 내재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 핵심은 우리의 공동체문화에 있다. 극단적인 예로 노숙자들이 신문을 펼쳐놓고 정치를 논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3·1운동은 조선왕실이 무너져 사실상의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도 민중운동으로 우리사회에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한 사건이었고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도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전통적 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애민정신이 정치적 명분으로 유지되었던 조선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과거 고조선까지 이르는 전통적 실용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이고 이를 통해 보편적 인재양성의 성과가 만든 결과들이다.
우리의 공동체 문화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저명한 철학자인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과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공동체문화의 완성에 두었다. 그의 저서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이에 공감하는 문화적 특성에 있다. 서구유럽에서는 그의 주장을 논리의 비약이라 넉두리 정도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벤담의 공리주의에서부터 니체나 칸트의 사상을 거치며 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장황한 비판의 결론으로 공동체주의를 주장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공동체 문화를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사회이고 보면 우리사회가 갖는 공동체 문화의 가치를 잘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공동체문화는 집단적 특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배려와 관용에 대한 실천적 문화에 있다.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이상이 우리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고 개인의 가치와 집단의 조화를 이루는 통합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개인주의나 무관심, 도둑과 같은 치안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정적인 요소는 항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도의 문제로 접근되어야 하는 것이고 대중에 의한 자발적인 사회통제기능이 작동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동체 사회의 관심이 공동체주의의 실현에 대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사회가 갖는 긍정성이 가치를 만들고 있다. 발달된 서구사회의 모습에서조차 이러한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면 우리의 공동체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시 가져봄도 좋을 듯싶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가장 낙후한 영역이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애민정신을 명분으로 삼았던 조선의 권력이 결국 50%에 달하는 천민 국가를 만들었고 민주화를 이룬 현대국가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정당구조를 가지고 변화를 거부한다. 기형적인 미국의 양당정치가 더 이상의 정치적 명분이 되어서도 안 되며 퇴행적인 일본의 내각책임제가 우리의 정치혁신의 방향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의 정치권력은 견제와 균형을 기반으로 제도적 혁신이 이루어져야 하고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관심과 정치참여가 보장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회나 지방의회가 성별과 연령층, 사회분야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50%의 법조인 출신과 50대 이상의 남성이 70%이상을 차지하는 현재의 의회구조는 변해야 한다. 국민투표에 의한 국민의 한 표가 사장되지 않기 위해서는 100%연동제가 실현되어야 하고 권력의 균형을 위해서는 다당제의 제도적 정착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대통령제가 의회해산권 등 우리의 제도보다 대통령 권한이 더 강력함에도 견제기능이 발휘될 수 있는 이유는 다당제와 연립내각에서 기인된다.
강성노조로 인해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남북의 대립상황은 해외투자가들의 국내투자를 꺼리는 이유기도 하였고 국내 주식시장이 지금도 저평가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자본시장의 저평가는 산업자본이 부족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입되는 자금의 흐름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의 토양이 되는 자본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노동운동이 우리사회 속에 급속히 자리 잡은 것도 산업발전 못지않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강성노조가 기득권화 하는 현상에 대하여 국민적 경계심이 생기고 이를 견제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생기는 것도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문화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현상 중에 특이한 부분이 또 있다. 다양한 종교가 인정을 받고 간혹 갈등의 아슬아슬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극단적 대립을 피해왔다는 사실이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의 폐쇄성을 수단으로 이를 종용하는 종교지도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신도들도 존재했다. 최근 보이는 극단적 우파 선동가들 중에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역사상 종교로 인한 대립적 상황이 극단에 치달은 경우는 없었다. 이 또한 인류사의 예외 현상 중에 하나다. 민족종교를 표방한 동학혁명의 천도교의 도전조차도 종교적 갈등이었다기보다는 일제침략에 대한 투쟁적 성격이 강하였다.
권력은 종교를 이용하여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군전쟁으로 시작된 종교전쟁의 역사는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한 이유도 종교 갈등이 원인이다. 지금의 중동의 긴장과 테러리즘의 발단이 되고 있는 이슬람의 종파전쟁도 정치권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오래된 대립이 실질적으로 충돌하는 이유가 아랍패권을 위한 정치권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슬람 최고지도자인 칼리프의 정통성으로 1500년을 대립한 결과물이라는 명분도 사실은 지역패권에 대중이 희생된 결과들이다. 급진 이슬람의 출현은 복잡한 중동의 정치지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알고 보면 수니파와 시아파를 망라한 독자세력을 갖고자 하는 정치권력투쟁의 일환일 따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에 의한 이러한 역사적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반공을 국시로 한 군사정권의 출현도 이러한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갈등이 양분되어 극단적인 대립이 없었던 이유는 북한을 주적으로 한 단순함의 결과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문화에서 기인된 것이다. 지금도 좌우이념이 대립하고 있다. 오래된 과거의 지나간 그림자가 아직도 우리 사회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론의 분열을 걱정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위에서 언급한 경우에 대비하면 스스로 그 통제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 문화는 근본적으로 통합을 향하고 있으며 분열을 거부하는 문화적 특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영토를 보유한 키르키스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른다. 그들은 단군과 고조선을 하나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공동체 문화를 분명히 하고 외국인의 이주를 받아들여야 하는 다원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간다는 현실에서 키르키스탄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사화이지만 그들은 유목민족의 다양성을 오래전에 받아들여 제도화 하였고 이를 국가운영의 방식으로 연방제국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공동체 문화의 새로운 가치정립은 투명성과 개방성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통적 공동체 문화의 실현과 의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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