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날]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史上 두번째 '압수수색'
서울지검 윤석열 팀장, 댓글 관련 서버 등 확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10년 전 헤드라인 뉴스를 통해 '과거 속 오늘'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더 발전했는지, 답보상태인지, 되레 퇴보했는지 점검해보고자 한다.
[뉴스 타임머신-10년 전 그날]
2013년 4월 30일 국정원 역사 이래 두번째 압수수색
지난 2013년 4월 30일은 두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국정원 정치개입'과 '윤석열'이다.
●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의혹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이 이날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이 국정원을 압수수색한 것은 2005년 8월 '국가안전기획부 불법 도정(X파일) 사건'에 이어 두번째다.
검찰은 이날 오전 8시 50분쯤 윤석열 팀장과 박형철 공공형사수사부장을 포함한 검사 7명과 디지털 과학수사 요원 10여 명 등 25명을 보내 13시간 30분에 걸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수사팀은 '댓글 작업'을 벌인 옛 심리정보국 사무실을 중심으로 내부 지시·보고 문건과 국정원 내부 인트라넷·컴퓨터 전산 자료를 확보한 후 현장을 철수했다.
국정원은 직접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한 게시글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선거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지만 직접 단 게시글에서도 특정 후보를 지지한 내용이 나왔다. 찬·반표시 행위를 통해 특정 후보에 유리하도록 해 여론 조작을 한 정황도 뚜렷해졌다.
검찰은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의혹을 뒷받침하는 물증을 상당부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압수수색은 국정원 메인 서버에 집중됐다. 참여정부 때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한 국정원은 메인서버에 저장된 기록물을 임의로 삭제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메인서버에 저장된 기록물을 삭제하려면 원장의 허가가 필요하고, 삭제 시에는 관련 근거를 기록토록 돼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근거를 들어 원세훈 전 원장 작성된 주요 문건들이 메인서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검찰이 압수수색 가능성을 공론화하면서도 증거인멸 가능성을 낮게 본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검찰은 압수수색에서 댓글 작업을 담당했던 심리정보국의 문건을 다수 확보했고 특히 압수물에는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생산한 업무결과보고서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댓글작업’이 국정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면 ‘업무결과보고서’를 통해 윗선에 보고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심리정보국의 '예산신청서' 문건도 압수물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큰데 댓글 작업을 위해 민간인을 고용했거나 금전적 보상을 대가로 민간단체와 협조체제를 유지한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다.
이날 검찰의 압수수색에 이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국정원과 연관된 아이디 73개를 추출하고 이들이 대선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유리한 활동을 한 정황을 폭로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특히 아이디 73개 중 일부 아이디를 통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게시글을 작성한 것으로 나타나 현재까지 직접 후보 지지 혹은 비방은 없었다는 국정원의 해명을 정면으로 뒤집게 됐다.
● 제20대 대통령 윤석열, 10년 전 그날엔 '서울지검 특별수사팀' 진두지휘
한편 10년 전 그날의 국정원 두번째 압수수색을 지휘한 서울지검 윤석열 팀장은 이 사건 이후로 '댓글수사' 외압을 폭로하고 박근혜 정권에서 좌천됐다.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윤 전 총장은 1994년 서른넷에 '늦깎이 검사'로 검찰에 발을 들인 뒤 대표적 '특수통'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강골검사', '원칙주의자'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오른팔'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노무현의 후원자' 고(故) 강금원 회장을 구속하기도 했다.
윤 전 총장은 2013년 4월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으로 발령받는 동시에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조작 의혹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됐다. 국정원 직원에 대한 체포·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는 등 원칙 있는 수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박근혜 정권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장에서 검찰 수뇌부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하며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항명 논란 속에 법무부 징계까지 받은 뒤 대구고검 검사로 사실상 좌천됐다.
● 윤석열, '서울지검 팀장'에서 '제20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무려 '9수'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4년 사법연수원 23기를 수료한다. 변호사로 개업하려다가 3년만 경험해보자며 뛰어든 검찰에 26년간이나 몸담았다.
대구지검에서 초임 검사로 시작해 초반에는 평범한 이력을 거치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굵직한 특수 사건에 투입되며 '칼잡이'로서 명성을 쌓아올렸다.
2003년 SK분식회계 사건과 불법 대선자금 사건을 시작으로 현대차그룹 비리 사건,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 BBK 특검, 저축은행 불법 대출 사건, 국정원 댓글 등을 맡았다.
10년 전 그날의 사건이 윤석열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뒀다. 정권에 밉보여 지방 고검 검사로 좌천, 4년여간 유배지를 떠돌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특수통 검사로는 숨통이 끊긴 듯했던 윤 당선인은 2016년 탄핵 정국을 맞아 최순실 특검 수사팀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소위 '촛불 혁명'의 공신으로 선배들을 제치고 서울중앙지검장에 파격 발탁됐다. '적폐 청산' 수사와 공소 유지를 진두지휘하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중형을 끌어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이재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기소하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수감시켰다.
오늘날 '정치인 윤석열'이 있게 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이른바 '조국사태'로 조 전 장관 딸의 입시 비리 의혹과 부인 정경심 교수의 사모펀드 의혹뿐 아니라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까지 파고들었다. 결국 정권과 전면전을 선포한 모양새가 됐다. 결국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검찰에서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사퇴의 변을 남기며 임기를 넉 달여 남기고 검찰총장직을 내려놨다.
문재인 정부와 대척점에 섰던 윤석율은 자연스레 정치계 '거물급 신인'으로 떠올랐다.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여야를 통틀어 지지율 1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 네 차례 연달아 패배하며 쪼그라들어 집권 플랜조차 마땅치 않았던 보수 진영은 윤 당선인을 대안으로 보고 러브콜을 날렸다. 3개월 남짓 두문불출하면서 기초체력을 다진 윤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대권 도전을 기정사실로 했다.
여의도 문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초창기 적응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윤석열 X파일' 논란으로 도덕성 리스크가 부각됐고, 과감하지만 서툰 화법으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한 뒤로도 이준석 대표와의 불화설에 휩싸이는 등 좌충우돌했다. 다만 당내 경선 과정에서 홍준표 의원, 유승민 전 의원, 원희룡 전 제주지사 등 산전수전 다 겪은 경쟁자들로부터 파상 공세를 받으면서도 탄탄한 지지율을 유지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대선 본선에 뛰어든 윤 후보는 여러 차례 시험대에 오르며 정치인으로 성장해갔다. TV 토론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대장동 게이트 연루 의혹을 부각하며, 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는 전략을 폈다.
윤석열 후보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정치력을 한 번 더 입증했다. 안 대표의 결렬 통보에 그동안의 협상 내용을 공개하는 맞불로 '밀당'을 벌이며 완주를 공언하던 그로부터 자진 사퇴와 지지 선언을 끌어낸 것이다.
윤석열 후보는 48.65% 1639만여 표를 얻어 당선을 확정지었다.
[전국매일신문] 김주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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