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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76] “ 낮으나 길게 울리는 북소리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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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76] “ 낮으나 길게 울리는 북소리 처럼…”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8.02.07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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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아주 작고 평범한 행위들이 더욱 빛을 발하고, 주변의 작은 일들에 소중한 가치를 할애해야 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느림의 철학’은 그래서 유용하다.-

 

설을 1주일 앞두고 있다. 이번 설 연휴에는 약간의 빈둥거림을 갖자. 설날 꼭두새벽 눈을 비비며 일어나 산행에 나서는 것도 좋지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온종일 게으름을 피우며 빈둥거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설 연휴 첫날부터 소란스럽고 북적거리는 세상을 나돌아 다니기보다는 하루 내 방안에 틀어 박혀 책을 뒤적이며 딩굴 거리는 편안함은 더욱 좋다.

마침 신문도 오지 않으니 TV도 휴대폰도 끄고, 세상을 닫자. 그리고 방안에서 행복해지자.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파스칼도 지적하지 않던가.

시계도 보지 말자. 창문에 햇살이 비치면 일어나고, 배고플 때 먹고, 졸리면 그대로 낮잠을 자자. 그리고 심심하면 그때에야 일어나 가족과 함께 발걸음이 닿는 데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거닐어 보는 것도 좋다. 단 하루만이라도.

생각해보면, 지난해에는 그 어느 해보다 회오리친 격랑의 세월속에서 우리의 생활은 숨 돌릴 틈조차 없는 너무나 각박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우리들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야만적인 정쟁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틀 속에서 쫓기면서 살아온 지난 1년. 그래 우리의 가슴은 가뭄 논바닥처럼 메마름으로 갈라져 있다. 주변의 사물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도 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도구적 관계로 이어지고 있어 서로간의 고립과 외로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요즘 바쁘시죠?”라는 말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사말이 되어버릴 정도로 ‘바쁨과 빨리’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일중독의 바쁘고 쫓기는 생활이 소유와 지위의 향상을 주는 대신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린 희생시키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더욱 비대해지고 탐욕스러워질 뿐이다. 그래 한번쯤은 멈춤을 갖자. 그때가 긴 겨울 밤 설 연휴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서 빠져나와 나를 보며 나를 가다듬는 시간이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하겠다.

설 연휴동안만이라도 게으름을 통해 우리의 생활방식을 관조해보고, 설날에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인간관계에 작은 변화를 주어보자. 행복은 단순한 것이고, 일상적인 일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느리게 일상적인 것에서 소박한 기쁨과 의미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아주 작고 평범한 행위들이 더욱 빛을 발하고, 주변의 작은 일들에 소중한 가치를 할애해야 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느림의 철학’은 그래서 유용하다.

이제 느림과 소박함은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의 문제이다.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부터 다시 조율해야 한다. 나의 이익과 소유를 위한 관계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율적이고 유연한 관계맺음이 행복의 출발이다.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는 ‘인류의 근본적인 분열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나누겠다고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고 지적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아는 감수성과 근원적 인간관계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설 연휴에는 이러한 관계 맺음을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하자. 사랑의 느낌, 아늑한 편안함 그리고 든든함은 가족구성원간의 진정한 관계의 회복에서 비롯되며 이는 타인과의 인간적 관계로 확산되는 출발점이 된다. 서로간의 고립과 외로움, 경쟁과 질시를 야기하는 도구적 관계 맺음을 그만 두고, 가족과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 맺음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삶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자. 프랑스의 사회학자 쌍소는 “삶은 세차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한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 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고 말한다.

앉은 듯 선 듯 엉거주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1년. 고슴도치처럼 가시의 날을 잔뜩 세워 서로를 미워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 속,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얼굴에 어떤 흔적으로 남기고 있는가를 가끔은 확인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빈둥거림의 휴식시간에 맑고 따뜻한 글을 읽는 것도 좋다. 전남 순천출신 고 정채봉 시인의 글도 그렇다. 그의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는 마음속에 사랑의 말을 간직한 체 죽어간 어린 소녀의 동백꽃 같은 순수한 사랑이 진하게 마음을 울리며 눈물 나게 한다. 이러한 섬세하면서도 잔잔한 감동들이 우리의 마음을 맑게 정화해주며, 이미 쏜 화살과도 같은 세월도, 유수같은 시간도 제자리를 맴돌며 귀를 귀울여 주지 않겠는가. 올해에는 내게 운명지어 준 나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살수있었으면 좋겠다. 낮으나 길게 울리는 북소리처럼…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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