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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셜미디어에 답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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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셜미디어에 답 있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4.1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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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양반 한 명이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서며 말했다. "취하셨습니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하나씩 신으셨어요." 그러자 양반이 꾸짖으며 말했다. "길 오른편에 있는 자는 나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길 왼편에 있는 자는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무슨 문제라는 말이냐." 연암 박지원의 '낭환집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양반의 말대로라면 오른편과 왼편에 선 사람들은 각각 "양반이 가죽신과 나막신을 신은 것을 봤다"고 했을 것이다. 한쪽에만 서 있으면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의 신발을 짝짝이로 신었는지 제대로 신었는지를 분간할 재간이 없다.

한 시대의 흐름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의 현안을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짝짝이 신발을 보는 것과 같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가 옳다, 그르다 할 것 없이 자신들이 본 것만을 주장하고 다투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본 것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너희가 본 것은 틀렸다"고 하는 이들을 적(敵)으로 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걱정되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다.

짝짝이 신발을 신은 양반의 모습을 보도한다면 기자는 어디에서 취재해야 할까. 길 오른편도, 왼편도 아닌 가운데에서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기술에 있다"고 했다. 취재하고 보도하는 일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에겐 어깨가 으쓱해지는 멋진 말이다. 하지만 취재 현장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수습 시절 "취재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봐야 한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정말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취재하면서 더 힘들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한쪽만 보지 않고, 모든 면을 보는 일'이다. "귀찮아서, 시간이 없어서, 답변을 해주지 않아서,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라서"라는 핑계를 대면 사달이 나기 쉽다.

아직도 전 세계 27억명이 종이신문을 읽고, 8억명 정도가 디지털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고 한다. 종이신문의 기사를 오려 붙이고, 밑줄 그어 읽고 또 읽는 독자들이 있는 것은 편집의 매력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제는 신문도 지면과 인터넷판을 결합해 심층적이고 신속한 보도로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교육현장에서도 신문을 활용한 다양한 교육을 하고 있다. 직접 취재도 하고 기사와 논평을 쓰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교양수준이 높아졌다고 한다. 신문을 만들면서 기사를 배치하고 제목을 다는 편집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학생이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어쭙잖게 취재방식이 어쩌고 신문 환경이 저쩌고 하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신문의 날'을 맞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어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3년에 발행된 한성순보를 꼽는다. 그러나 한성순보는 정부가 발간한 신문이었고, 한문만으로 기사를 작성해 일반 대중화에 이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정부 발행의 한성순보를 일각에서는 관보적 성격으로 보는 관점도 있으나 근대 신문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은 독립신문이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됐다. 서재필과 개혁파가 합작하여 창간한 이 신문은 순수 한글로 만들어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신문으로서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다.

처음에는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돼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영문판만 별도로 발행했다. 격일간지로 출발하여 일간지로 발전했다. 우리나라 신문 역사에 여러 신문이 창되는 계기를 만든 신문이여서 역사적 의미도 있다. 초창기 이 신문의 크기는 가로 22㎝, 세로 33㎝의 타블로이드판이며, 모두 4면을 발행했다.

특히 초창기 독립신문은 만민평등과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당파를 초월한 엄정 중립의 보도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개방정책이 막 시작될 무렵이어서 신문이 국민계몽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정부정책을 국민에게 해설하고 전달하였으며, 국민의식과 사상 변화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 일에 맞춰 1957년 한국신문협회는 이 날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고 기념행사를 가졌다. 올해도 한국신문협회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공동으로 최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제62회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서 신문협회는 “신문은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대표적 공공재”며 “신문의 공익성은 어느 매체도 대신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냈다.
 
일본에서 수입한 ‘푸트 인쇄기’와 납 활자로 신문을 찍었다. 한 해 전 일어난 임오군란 직후 외교 마찰을 해결하러 일본에 간 박영효 일행이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 왔다.한성순보가 최초의 신문인 까닭은 3500부를 활자로 찍어 독자가 한 부에 구독료 30문을 내고 읽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조정 소식을 알리던 ‘조보(朝報)’는 필사본으로 제한된 독자만 볼 수 있었다.
 
활자 인쇄 신문은 서양 문명을 소개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독자에게 실어 날랐다. 기자와 편집자는 새로 탄생한 직업이었다. 이들은 뉴스를 선택·가공·해석해 일부 계층만 향유했던 지식을 다수 독자에게 전했다. 일본과 서양의 담론이 경쟁력으로 유입되면서 성리학과 중국의 우월적 지위는 급속히 무너졌다.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지만 종이와 신문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신문의 역할은 여전히 막중하다. 정보의 제1가치인 정확성·심층성으로 봤을 때,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인터넷 모바일 매체는 종이신문을 따라올 수 없다. 인터넷의 수많은 뉴스 가운데 핵심 콘텐츠 대부분은 신문기자들이 발로 뛰며 취재하고 꼼꼼하게 확인한 것이다.
 
호주의 미래학자 도슨은 ‘2026년이면 한국에서 종이신문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 학자의 전망은 다른 예측에서 이미 빗나간 것이 많다. 하지만 종이신문은 디지털미디어 시대, 끊임없는 혁신을 꾀해도 시대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 아날로그 시대의 권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잃어버린 독자가 많다.
 
늦었지만 신문은 공동체와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견인하는 핵심 공공재(public goods)로 재평가 되고 있다. 종이신문을 위한 제도적·재정적 지원 확대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인터넷과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신문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신문의 위기가 신문 본질의 기능적 위기로 이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신문 산업의 분발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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