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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송덕비(頌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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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송덕비(頌德碑)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6.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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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세금은 땅에서 내는 전조, 노동력을 제공하는 군역과 요역, 그리고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었다. 이 중 공납은 전체 세금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는데, 지방 특산물의 생산이 해마다 풍흉이 심해 납부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상인이 대신 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방납, 대납의 폐단이 컸다. 임진왜란 이후 공납의 폐단이 극심하여 호피 방석 한 개의 값이 쌀 70여석으로 폭등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영의정 이원익은 공납을 쌀로 내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토지 1결당 쌀 16말을 부과했는데, 나중에 12말로 낮추었다. 토지 1결이라 함은 300두의 쌀을 수확하는 땅이니, 4%의 세율을 뜻한다. 과거 호수별로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토지 결수에 따라 부과하니 조세의 공평성이 크게 높아져 서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됐고, 부자와 양반들의 부담은 증가했다.

당시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백성들은 춤추고 개들은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 효종 때 ‘왕정은 안민보다 우선인 것은 없다’는 기치 아래 김육, 조익 등이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해서 충청, 전라까지 확대됐고, 숙종 때인 1677년 경상도로, 그리고 1708년에는 황해도로 확대됐다. 이와 같이 유장한 역사를 보면 대동법은 200년 모색해서 100년 걸려 도입됐다고 하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대동법 확대 실시의 최고 공로자인 김육(1580~1658)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온몸으로 겪으며 고생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처형된 사림파 김식의 4대손이어서 개인적 고생까지 더했다. 김육은 천신만고 끝에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해서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으나 1613년 영창대군을 폐해서 죽이고 훌륭한 대신들을 몰아낸 계축옥사를 보고는 출세를 포기했다.
 
가족을 이끌고 가평 잠곡의 토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2년 뒤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다. 숯을 구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동대문에 새벽 파루를 치면 제1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숯을 지고 오는 김육이었다. 김육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비로소 조정에 나가 일했다. 모리야 히로시가 쓴 <남자의 후반생>을 보면 인생 후반부에 두각을 드러낸 중국사의 22명 영웅호걸이 등장하는데, 김육이야말로 전형적인 후반생의 인물이다.
 
1638년 김육은 충청관찰사에 임명되자마자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에는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사옵니다”라고 하면서 대동법을 건의했다. 70세 때 김육은 아직 대동법이 법제화되지 않는 걸 보고는 드디어 사직 상소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즐거이 살면서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대동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저를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효종은 김육을 우의정에 임명하며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대동법 추진은 순탄치 않았다. 기득권 세력인 부자, 양반들이 반대했고, 그중 최대 반대자들은 송시열, 김집 등 노론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동법이 너무 급진적 정책이어서 오히려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주장했다. 노론과의 갈등 때문에 결국 김육은 사직했다.
 
김육은 죽을 때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 죽기 열흘 전 남긴 유언에서도 “신의 병이 날로 깊어가 실낱같은 목숨도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는다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호소했고, 죽기 하루 전에는 영의정에게 편지를 보내 대동법 시행을 부탁했다.
 
김육은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육의 부음을 듣고 백성들이 조의금을 들고 문상을 갔다. 그러나 조의금을 받지 않자 그들은 의논 끝에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朝鮮國 領議政 金公堉 大同均役 萬世不忘碑)’라는 글귀를 새긴 송덕비를 세웠다.

지방관료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효시는 전남 순천 ‘팔마비(八馬碑)’다. 고려 충렬왕 때 순천 영동지방 승평부사를 지낸 최석(崔碩) 선정비(善政碑)다. 최 부사가 비서랑으로 직을 옮기자 백성들은 관례대로 말 8필을 선물했다. 하지만 최석은 폐습이라며 개경으로 오는 도중 태어난 망아지까지 합해 9필을 돌려보냈다. 감동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부사에게 말을 선물하던 폐해가 사라졌다.

관료의 공덕을 칭송해 백성이 자발적으로 세우는 것이 송덕비의 취지다. 공적을 엄격히 심사해 왕의 칙령을 받도록 했지만 협박과 억지를 앞세우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비 건립을 강요한 관리의 악정에 대한 분풀이로 비사치기(비석차기) 놀이가 생겼을 정도다. 조선시대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은 부친 송덕비를 세운다는 핑계로 돈을 걷다가 동학농민운동에 불을 지폈다. 함양군수 시절을 칭송한 선정비의 진실성 논란도 이 같은 행적에 근거한다.

전국에 산재한 송덕비는 과거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많았다는 방증이겠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에 묘사된 조선 민초의 삶은 지옥이다. ‘일 년 동안 현감이 네 번 바뀌어 전별금을 모으느라 마을은 결딴이 나고, 송덕비를 세우는 사이 새 수령 행차가 또 들이닥친다. 백성은 신관 사또가 오래 머물게 해달라며 관찰사에게 소장을 올린다. 끼니거리도 없는 마을 어귀에는 송덕비 스무 개가 즐비하다.’
 
오는 13일 새로운 ‘지방권력’이 대거 탄생한다. 로마 전성기를 이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에서 지도자의 덕목을 나열했다.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용감한 사람이 되라.” 송덕비를 세우고픈 참된 지역일꾼이 대거 탄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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