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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 베네수엘라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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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 베네수엘라의 몰락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9.03.07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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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 한때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살던 나라. 그 베네수엘라가 파국의 벼랑 끝에 있다. 베네수엘라에는 지금 2명의 대통령이 대치하고 있다. 작년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니콜라스 마두로가 대통령궁을 차지하고 있는 한편, 올해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후안 과이도 의원이 스스로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장성이 2000명이나 되는 베네수엘라 군부의 지지를 업고 철권을 휘두르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과이도 국회의장은 경제난에 허덕이는 반정부 시위 군중의 지지를 받으며 불법 부정선거로 선출된 마두로는 정통성을 잃었다며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한 나라에 대통령이 둘이 생겼으니, 베네수엘라는 갈 데까지 간 나라꼴이다.

베네수엘라의 오늘을 상징해주는 것이 ‘인플레이션 100만%’다. 작년에 IMF가 발표한 수치다. 올해는 1000만% 인플레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쯤 되면 사실상 돈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베네수엘라 국민 3000만 명 중 90%가 남아메리카 최악의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생존의 기본인 식량과 의약품을 구하지 못해 아비규환이다. 살길을 찾아 브라질과 콜롬비아로 탈출하는 난민이 계속 늘고 있다. 유엔에 의하면 2014년 이후 국경을 넘은 베네수엘라 난민 수가 300만 명을 넘는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올해 난민 수가 50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경제 및 정치적 파국은 우고 차베스의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9년 대통령에 선출된 차베스는 반미 사회주의 노선으로 베네수엘라를 통치했다. 그는 2013년 암으로 죽으면서 마두로를 후계자로 선택해 권력을 물려줬다. 두 사람은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자들이었지만 권력을 지키는데서 차베스는 행운아였고, 마두로는 불운아인 셈이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 건 석유 값이다.

차베스의 집권 시기는 석유 값이 폭등하던 고유가 시대였다. 집권한 그는 국내정치에서는 반대파를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철권통치와 사회주의 포퓰리즘 정책, 대외적으로는 쿠바 등 남미 좌파 정권과 연합하여 반미노선을 펼쳤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는 등 사회주의 복지주의를 펼쳤고, 그의 카리스마에 경도된 국민들은 열광하면서 그를 네 번이나 대통령으로 밀어주었다. 유가 상승이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석유시설 위주의 베네수엘라 경제는 고용을 거의 창출하지 못했다. 빈곤층이 마구 늘어났지만 차베스는 이를 넘쳐나는 오일 달러로 그때그때 땜질하며 대응했다. 필요한 물품은 오일달러로 수입하면 됐지만, 그 대가는 국내산업의 붕괴였다. 차베스는 이 위기를 고유가와 개인적 카리스마로 버텼다.

그러나 마두로 대통령의 집권기간엔 석유 값이 폭락했다. 국가재정으로 대중을 달래던 복지정책은 작동할 수 없었다. 마두로는 차베스와 같은 대중적 카리스마도 없었고, 오일 달러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먹고살 게 없으면 당연히 민란의 싹이 트기 마련이고,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2015년 총선에서 야당이 다수당이 되어 도전적인 반정부 세력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정정이 혼미하다. 최악의 경제난이 정치파탄으로 이어졌다. ‘한 지붕 두 대통령’ 체제가 그 징표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들까지 가세한 퇴진운동에 직면해 있다. 미국과 중남미 14개국은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정부 수반으로 이미 인정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마두로의 마지막 동아줄이다.

마두로 정권의 곤경은 예고된 결말이다. 전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국민의 환심을 사는 정책에 '올인'할 때부터 비극의 싹은 텄다. 그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뒤 나라 곳간을 헐어 가짓수도 세기 힘든 무상 시책을 펼쳤다. 마두로가 국제유가 하락으로 재정이 거덜났음에도 이를 계승한 게 화근이었다.

대를 이은 인기영합의 대가는 참담했다. 작년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약 140만%였다. 최근 3년간 인구의 10분의 1인 300만명이 굶주림을 못 견뎌 탈출했다. 같은 언어권인 스페인의 관광도시들은 몸 파는 베네수엘라 여성들로 넘쳐난다. 한때 세계 20대 부자국가의 현주소다. 오죽하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최근호에 ‘베네수엘라의 국가적 자살’이란 제목의 논문까지 실렸겠나.

베네수엘라는 지리적으론 우리와 까마득하다. 한반도와는 지구상의 정반대편을 가리키는 대척점과 멀지 않다. 그럼에도 여기서 전해져 오는 어수선한 뉴스들이 필자에겐 먼 나라 얘기가 아닌 것처럼 비친다. 지난 연말에 읽은 한 연구기관 보고서의 여운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탓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 경제위기에서 배우는 4가지 교훈’이란 보고서를 냈다. 석유산업에 편향된 경제구조, 과도한 복지, 규제 위주의 관치경제 그리고 공직자 부정부패 등을 경제파탄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다. 이 중 ‘석유의존형 경제’를 뺀 나머지 셋은 한국 경제의 위기요인과 오버랩된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추락은 포퓰리즘의 덫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즉 복지지출의 불가역성이란 치명적 속성 말이다. 생각해 보라. 쥐여준 떡을 거둬들이는 게 쉬운 일인가. 재정이 바닥난 마두로 정권도 선심정책은 포기하기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베네수엘라식 착한 정책’에 눈먼 듯해 사뭇 걱정스럽다. 문재인정부는 얼마 전 24조원 규모의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예비타당성 면제를 밀어붙였다. 이용객이 없어 ‘고추 말리는 공항’이나 다람쥐가 이용하는 도로를 닦아 ‘지역 표심’을 달래려 한다면 국가적 불행의 전주곡이다.

지금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는 치안마비 상태다. 마두로 정권이 또 최저임금을 34배 올리는 복지대책을 내놨지만 노동자와 청년들의 분노가 극에 이르면서다. 카라카스의 대척점에 가까운지라 경기도 성남시는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건가. 청년이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지역상품권 2만원어치를 주겠단다. 그것도 막 투표장에 들어갈, 만 19세 되는 청년에게만! 마두로판 현금살포 복지와 무엇이 다른가.

지속가능성이 없는 베네수엘라식 복지정책을 답습해선 곤란하다. 가난한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책을 누가 탓하겠나. 이를 무조건 포퓰리즘으로 매도할 순 없다. 하지만 비용·편익 분석이나 재원조달 방안 등을 엄밀히 따져보지 않는다면 문제다. 생색은 당장에 내고, 뒷감당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는 정책이 결국 망국병을 부르는 독소임을 베네수엘라 사태가 웅변한다.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의 몰락 배경에는 차베스와 마두로 집권 20년간의 포퓰리즘, 민중주의, 반(反)기업 등이 깔려 있다. 선출된 독재자들은 ‘국가가 다 해준다’는 퍼주기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란 환상으로 최면을 걸고 권력을 구가했다. 고유가 때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유가 하락과 함께 20년 적폐가 고스란히 수면 위로 노출된 것이다. 그러고도 버티는 것은 아직도 모든 문제를 미국 탓, 외자 탓으로 돌리면 먹히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에서도 차베스 열풍이 불었다. ‘베네수엘라에 길을 묻자’는 특집보도가 쏟아졌다. 좌파진영 일각에선 차베스의 ‘반미 코드’를 새로운 진로인 양 치켜세웠고, 그의 사망 때는 분향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말이 없.

요즘 나라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베네수엘라를 자주 언급한다. 복지포퓰리즘 경쟁, 반기업 규제 홍수, 법 위에 올라탄 ‘떼법’과 ‘국민정서법’, 내로남불과 남탓 등이 닮은꼴이란 얘기다. 획일적인 한국 사회는 포퓰리즘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일 수 있다. 퍼주기 포퓰리즘은 사실 막장드라마처럼 욕하면서도 끌린다.한 경제계 인사의 독백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넘어져도 벌떡 일어났는데, 이제 또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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