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약산 김원봉 선생의 삶
상태바
약산 김원봉 선생의 삶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9.06.20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약산 김원봉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밀정'과 '암살'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로 드라마틱하게 재조명을 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정쟁의 대상이다.

김원봉(1898∼1958)의 서훈 문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시발점이다. 야당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김원봉을 서훈 대상자로 상정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사실 문재인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는 김원봉을 서훈대상자로 재고하자는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무정부주의자나 혹은 좌,우익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정파에 상관없이 모두 한마음으로 일제에 맞섰다는 것이 추념사의 취지이다.
 
이 추념사를 두고 일부 단체에서 김원봉을 재평가하고 서훈대상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정치권의 논란이 확산됐다.논란을 불러올만한 인물을 굳이 거론하면서 정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잘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될 만한 내용이 크게 없는데도 이념공세를 가하는 야당이다.
 
국민여론도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해 찬성 약 43%, 반대 약 40%로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최근 김원봉의 서훈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정부 수립 후 반국가 활동을 할 경우 포상에서 제외한다고 한 독립유공자 포상 조항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지켜보면서 320억원의 막대한 현상금을 내 걸 정도로 일제가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가 되찾으려 했던 조국은 과연 어디였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해방된 고국 땅에서 일제의 악질 경찰에게 고문과 모욕을 당하도록 만든 남한인가, 아니면 유일 독재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그를 이용만하다 버린 북한인가.
 
적어도 김원봉은 해방 후에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 목숨 건 무장투쟁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쪽에서 친일파의 신분세탁 도구로 악용된 좌익이라는 굴레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을 안겼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북한에서도 그는 버림을 받고 말았다.
 
더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좌우익간의 이념대립과 같은 양상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치도 변함없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제에 김원봉의 행적에 관해 객관적 평가는 해볼 필요가 있다. 밀양 사람 김원봉은 1916년 18세 청년 나이로 일제에 저항하여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19년 길림에서 무정부주의적 의열단을 조직하고, 무한에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대장직을 맡았다.

그 조직이 1941년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발전했다. 조선의용군은 초기에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으나 결국 이 문제로 조직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1941년 무정과 창익, 박일우 등 좌파는 화북의 팔로군에 가담하고 무정은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이 된다.

1942년 김원봉은 의용군 일부를 이끌고 중경의 광복군에 합류하여 부사령관이 된다. 광복군 장준하, 김준엽도 중경임정에 합류하던 시기이다. 김원봉의 광복군 복귀는 매우 잘된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45년 갑작스런 조국의 해방은 김원봉의 선택을 어렵게 했다. 그는 1945년 12월 늦게 서울로 환국했지만 그에게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해방공간의 국내 정국이 김원봉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로부터 또 다시 수모를 당했다.

반민족특위는 유명무실해지고 이승만이 친일 청산의 의지마저 보이지 않자 그는 불만이 더욱 커졌다. 결국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 문제로 어수선한 해방공간에서 그는 북쪽 정권을 선택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과 같이 평양 정치 협상회의에 갔다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중경시절 비서 사모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에 가고 싶지 않지만 남한 정세가 나쁘고, 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의 월북이 자진이냐 납치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그의 월북이 자진이냐 납치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후 김일성은 그에게 국가검열상이란 장관직을 주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광복군 출신 김원봉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2년 그는 노동상으로 발탁되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우리의 국회부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그는 1956년 갑자기 실각되고, 1958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죄’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 청산가리 독살설, 자살설도 등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은 6·25 전쟁 후 연안파 무정도 숙청하고, 친소파 거두 허가이, 남로당 대표 박헌영도 숙청했다. 그들은 모두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토사구팽당한 인물들이다. 결국 김원봉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하의 암울한 청년시절, 의혈단과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고, 광복군에 합류하여 군무부장을 맡은 김원봉의 행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결코 폄훼되어서 안 될 부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한 정세에 대한 불만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10대에 항일운동에 나선 열혈청년 김원봉, 풍찬노숙하며 조국 광복에 매진했지만 해방 공간에서 그의 형제 4명은 남쪽에서 좌익분자로 몰려 처형되고, 그 자신은 북한에서 희생제물이 되었다. 민족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먼 훗날 남북이 하나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 그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념의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정말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때와 똑같이 고국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비운의 독립운동가는 편히 몸 누일 곳을 아직도 찾지 못한 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