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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리더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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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리더의 겸손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5.03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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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싸움을 본 적이 있는가? 소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머리를 최대한 낮추는 것을 볼 수 있다. 머리를 치켜들면 상대 소의 단단한 뿔에 받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려면 머리를 상대 소보다 낮추어야 한다. 생존과 리더십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국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동양에서는 예부터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 왔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를 키우면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수없이 인용하곤 한다.

“산 중달이 죽은 공명을 못 이긴다.”는 고사가 있다. 제갈공명이 공격은 하지 않고 수성만 하는 사마중달에게 싸울 것을 종용하기 위해 여자 옷을 보내면서 조롱했지만 중달은 껄껄껄 웃으면서 그의 건강과 일상생활에 대한 것 같은 사소한 것들만 묻고는 사신을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대화에서 공명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공격하지 않고 기다리자 결국 건강이 좋지 않은 제갈공명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기다리던 사마중달은 퇴각하는 초나라 군사를 공격했지만, 나무로 만든 공명이 수레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몇 십리를 도망쳤다. 그런 사마중달 사마의가 결국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적을 이루게 된다. 사마의는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나는 제갈량에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는 얘기는 자신의 겸손함을 아주 잘 드러낸 말이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19세에 장원급제를 해 20세에 경기도 파주군수가 된 맹사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19살 때 장원급제가 됐으니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교만한 마음을 가졌을까? 그런데 맹사성이 파주 군수로 가기 전에 당대에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서 이 고을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좌우명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고명한 선생은 “항상 착한 일만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 줬다. 그러니까 맹사성이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이지 않소. 먼 길을 찾아온 사람에게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들으려고 어기까지 오진 않았소”하고 기분이 나빠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까 고명한 선생께서 “온 김에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지오”라고 해서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차가 나오니까 선생이 물을 찻잔에 붓는데 찻 잔이 넘치는데도 계속해서 붓는 것 이었다. 방바닥이 흠뻑 젖도록 물을 붓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맹사성이 “왜 그러십니까?” 라고 소리를 치니까 그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 “찻잔에 물이 넘쳐서 방바닥이 물에 적시는 것을 볼 줄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서 교만이 철철 흘려 넘치는 것을 볼 줄 모르십니까? ”라고 나무랬다는 것이다. 맹사성이 너무 부끄러워서 빨리 일어서다가 문설주에 아마를 찧었다. 그러니까 선생은 “고개를 숙이면 머리를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해다.
 
여러분 왜 가정에서 부딪힙니까? 왜 직장에서 부딪힙니까? 왜 모임에서 부딪힙니까?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입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힐 일이 없다는 것이다. 휼륭한 사람들의 특징은 겸손함이다. 휼륭한 사람들의 겸손함은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절대자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똑바로 주차를 했다고 믿고 차에서 내려 보면 이상하게도 차가 삐뚤게 주차되어 있는 것을 곧잘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 횟수가 점점 증가됨을 느낀다. 처음에는 주차선이 잘못 그려졌거나 옆 차량이 삐뚤게 주차된 것으로 나름 생각해 보기도 하였지만, 확인해 보면 공연히 이름 모를 차량 운행자만 죄 없이 오해한 형국이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나이 먹음에 따른 주차 실력과 공간 인지력의 저하, 그 이하나 그 이상도 아님에 씁쓸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남이 아닌 내가 문제였고, 내가 부족한 것이었다. 단지 이 명확한 사실을 깨닫지 못 한 무지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진실을 가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장과 판단만이 옳고, 타인의 그것은 틀렸다고 여기는 정말 '틀린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겸손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판사가 법대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심판권자와 심판대상자만이 존재한다. 그곳에는 심판권자로서의 권위와 엄격함 그리고 판단의 무오류성과 같은 단어들만이 횡행할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 판사조차도 비록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불안전한 존재인 나약한 인간일 뿐임을…. 그렇기에 판사의 판단도 때로는 틀릴 수 있음을, 오판이 있을 수 있음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겸손하라고, 함부로 남 훈계하지 말고, 그저 법에 주어진 권한 행사에 따른 결과물인 판결로만 말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 세상에 틀린 것은 없고, 단지 다름만이 있다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유행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다름'과는 다른, '옳고 그름'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다름' 만연의 사회에서 옳은 것은 옳은 것이요, 그른 것은 그른 것이라고 과감히 선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탁월한 분별력과 용기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산물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그 누군가는 반드시 이 역할을 수행해 주어야만 한다. 이들이 바로 리더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리더의 통찰력과 용기가 없다면 공동체의 전진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감하게 옳고 그름을 말해 줄 수 있는 리더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 판단과 결정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리더에게는 그 통찰력과 용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돌아볼 일이 있다. '혹,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리더가 갖추어야 할 통찰력 중의 통찰력이요, 용기 중의 기가 아닐까? 이 겸손 품은 자들이 리더로 활동하는 곳에 상호 존중과 약자 배려의 정신이 깃들 수 있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발전과 구성원의 행복이다. 하지만 어쩌랴. 불행하게도 리더가 유능하면 할수록 본인의 부족함과 오류 가능성을 깨닫는 겸손을 갖추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네 세상 이치이다. 유능한 리더일수록 더욱 더 성찰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리더여, 잊지 말라. 그대는 뛰어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존재는 결코 아님을….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이 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르고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제대로 일할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을 선택하는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겸손한 사람을 선택하여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일할 것이고 백성들을 위해서 일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나선 분들에게 부탁을 드린다. 선거에 선택을 받아서 당선되고 나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부탁해 본다.
 
열흘 붉은 꽃은 없으며 영원함을 누리는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겸손을 잃으면 6월 지방선거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역전패를 안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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