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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3.1절 베르사유의 배반을 딛고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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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3.1절 베르사유의 배반을 딛고 전설이 되다.
  • 승인 2018.02.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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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선양팀장 강양미

 

 

1919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어느 민족이나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

 

로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한 14개 조항의 평화원칙을 제창한다.

 

 

당시 재일유학생들은 뉴스를 통해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독립의 때가 도래했다.’고 믿고 일제의 한복판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선포한다. 그리고 각자 귀국해 우리 민족 최대의 저항 운동이던 3.1운동을 보이지 않게 후원하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과 더불어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다는 소식도 크게 작용했다. 진정 그들의 눈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큰 기대를 모았던 민족자결주의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카드일 뿐이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 한글자도 없었던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에 역사는 파리강화회의를‘베르사유의 배반’이라고 부른다.

 

사정은 이러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런 외부적 요인에 좌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학생과 종교인이 중심이었던 3.1만세운동은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피해도 컸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3.1만세운동 당시 사망한 사람만 7,509명, 부상자가 15,850명, 체포된 사람이 45,306명이라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한 사람은 200여만 명이 넘었고 전국 213개 군 중 203개 군에서 총 1,542회에 이르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가 2000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10%가 목숨을 걸고 거국적 독립운동에 참가한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기록인 것이다.

 

그 사상적 기반의 한 축이던 민족자결주의의 토대는 무너졌지만 3.1운동은 베르사유의 배반을 딛고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중국, 인도 등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국가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된 것이다. 이는 일제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뜨거운 나라사랑 정신으로 맞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 민족의 힘이었다.

이렇듯 3.1절은 폭력과 폭압으로는 대한민국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후세와 전세계에 알린 뜻 깊은 날이다. 올해로 99주년을 맞은 3.1절은 대외적 환경의 엄혹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저력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 영원한 자긍심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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