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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0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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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0세 시대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9.02.0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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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군의 계급, 직장의 직급 등 사회적 위치를 기준으로 종합적으로 평가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나이’가 중요한 기준으로 추가된다. 사회학자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기 이전 수직적 사회질서를 규율하던 ‘신분’ 대신에 ‘나이’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본다.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동년배가 동시에 학교 입학·수학·졸업, 직장 입사·승진·퇴직하는 일련의 과정이 만들어졌다. 즉 나이가 개인의 생애주기를 결정하는 기본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가족 내 서열 기준이었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원리가 전 사회로 확장됐다.

쌍둥이도 서열을 매기는 가족 내 질서 기준이 사회로 확장되면서 동년배 사이에서도 누가 생일이 빠른지를 따지게 됐다. 한국인은 처음 만나면 대부분 나이를 물어보고 위계를 설정하거나, 여의치 않은 경우는 상대방의 나이를 마냥 궁금해한다.

말할 나위 없이, 다른 나라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이 만나서 맺는 사회적 관계에서 ‘나이’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영어나 현지어로 소통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이 만나 한국어로 소통하며 맺는 사회적 관계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어 ‘친구’는 영어 ‘프렌드’(friend) 중국어 ‘펑요우’(朋友)와 의미가 상통하지만 그 포괄범위는 명백히 다르다. 중국어 ‘펑요우’는 나이 위아래 10년까지를 포괄하고, 영어 ‘프렌드’는 아예 나이 기준이 없다.

한국어의 친구와 선배·후배를 합한 범주는 ‘펑요우’와 포괄범위가 비슷하나 ‘프렌드’보다는 협소하다. 필자가 외국인 대상을 분석하면서, 조선족 동포의 경우 다른 나라 출신 외국인보다 친구 수가 유독 적은 이유를 찾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동년배로만 ‘친구’ 관계가 형성되는 한국문화를 신기해한다. 상호 관심사가 같고 호감이 있으면 나이와 무관하게 ‘프렌드’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나이를 기준으로 서열을 설정하고, 존비법을 사용하는 문화를 낯설어한다.

존댓말은 상대방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단어와 접미사를 문장에 적절히 배치해야 하고, 반말은 다른 단어와 접미사를 사용해야 하는데, 외국인에게 그것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외국인은 ‘프렌드’나 ‘펑요우’ 사이에서도 존비법이 사용되는 언어 환경이 여전히 어색하다. 그들은 한국어의 존비법이 개인이 점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의 상하관계를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장치라는 점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전통사회 가족 내에서 장유유서가 나름의 기능을 했다면 현대사회에서 나이 기준으로 개인 간 서열을 설정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형제자매는 수평적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수평적 관계를 맺은 개인으로 구성되는 ‘시민’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고, ‘나이 차별주의’에 따른 사회적 폐해를 없앨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프렌드’보다 매우 협소하게 정의되는 ‘친구’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권력’이 되기도 하지만 ‘멍에’도 되는 양날의 칼이다.

신정을 보내고 다시 맞은 설 새해가 되면서 ‘나이 논쟁’이 뜨겁다. 해가 바뀌니 나이 한 살 더 먹어야 하는데, 이 나이를 세는 셈법이 복잡하다는 내용이다. 중년·장년·노년층은 현재 사용하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을 선호하는 반면, 젊은 세대는 외국에서 사용하는 ‘만 나이’ 계산법을 선호함에 따라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나이 논쟁은 해마다 발생하고 있어 딱 부러지는 교통정리가 필요할 시점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사용되는 나이 계산법은 4가지로 파악된다. 일상 생활에서는 출생 연도부터 한 살이 되고 새해마다 한 살씩 증가하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인 ‘세는 나이(햇수 나이)’가 있다. 또 법률관계에서는 출생일부터 나이를 계산하는 ‘만 나이’도 있다. 병역법 및 청소년보호법 등 일부 법률에서는 현재 연도에서 출생연도를 뺀 ‘연 나이’도 사용한다. 1~2월 출생자들은 전년도 출생자와 같은 해에 학교를 다니면서 생겨난 ‘사회적 나이’도 있다.

현재 ‘세는 나이’를 쓰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의 1910년대 이전 문헌의 나이는 모두 ‘세는 나이’ 계산법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1950년 이후,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만 나이’만 쓰고 있단다. 현재 북한도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우리가 대한민국만의 나이 계산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도 그렇다.내 나이가 많아지면서 가장 관심이 가는 이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한 현역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들을 다룬 다큐프로그램들을 즐겨 본다.

‘100세 개인전’이란 다큐멘터리는 카르멘 에레라란 화가의 삶과 예술을 다룬 작품이다. 1915년생으로 104세인 그는 젊은 시절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인 미니멀리즘을 고수했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대형 미술관의 전시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89세에 처음 그림이 팔렸고 100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은 미국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작품도 판매하면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체력은 나이가 50대 정도를 정점으로 점점 하향곡선을 긋는다.그러나 지력은 나이가 들어도 증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은 90살까지 현직에서 일했다. 심구경 정승은 75세에 정승이 되었고 81세에 득남했다. 송순은 92세에 지중추가 되었고 오겸은 찬성으로 89세, 홍섬은 영의정으로 82세, 원혼은 판중추로 93세, 임열은 지중추로 82세, 송찬은 우참찬으로 88세, 성호 이익은 82세에 영중추라는 벼슬을 시작하였다.

근현대사 인물들 중에도 나이와 무관한 인물들이 많다.김대중은 73세에 대통령이 되었고 김종필은 72세에 국무총리가 되었다. 연세대 전 철학과 교수김형석은 현재 100세이지만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머리를 잘 사용하면 오히려 능력이 증가한다. 물리적인 나이를 문제삼는 것은 차별이다. 오히려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고가 얼마나 구시대적으로 경직되어 있는지를 논쟁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공부하지 않고 게을리 살거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휩싸여 있으면 그것이 문제이다.

‘아이리스’란 작품은 현재 미국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 아이리스 아펠을 조명했다. 98세인 그는 인테리어 전문가이지만 평생 세계를 여행하며 모은 독특한 액세서리를 놀라운 감각으로 연출해 패션계에서 더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고가의 보석이 아니라 벼룩시장에서 산 5달러짜리 팔찌, 아프리카 스타일의 목걸이 등으로 온몸을 휘감은 그는 패션 전공 학생들에게 강의도 한다. 100세에 가까운 지금도 액세서리를 쇼핑하고 패션화보에 모델로 등장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자랑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02세에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김병기 화백, 99세에도 매월 전국을 누비며 10여차례 강의를 하고 매주 칼럼을 쓰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 92세의 현역 방송인 송해 선생, 역시 92세에도 매일 7시간씩 일을 하는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등이 100세 시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현역들의 공통점은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욕망과 집착 대신, 또 남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자신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면서 비록 인정을 받지 못해도 운명과 세월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이는 슬픔이거나 걸림돌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은 탑처럼 혹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점 깊어지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나이의 힘은 그저 나이만 먹는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걸림돌이건 디딤돌이건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 디뎌와야 생긴다. 또박또박 걸으면서 생기는 근육의 힘처럼 필자도 나이의 힘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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