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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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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
  • 최승필 지방부국장
  • 승인 2016.11.2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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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재위 1495~1506)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폭군’이라는 오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군주다.
1495년부터 1506년까지 12년에 걸친 길지 않은 재위기간동안 두 번의 사화(士禍)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그 당대에 확고히 내려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일반적인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나 ‘종’이 아닌 ‘군’이라는 묘호(廟號)가 붙여졌고, 그의 시대를 다룬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렸으며, 종묘에서 배제되고,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초라한 ‘묘’에 안치됐다는 점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로 책봉된 뒤 12년간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할 정도로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다. 연산군은 이처럼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자신의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凌上)’으로 규정했으며, 그것을 척결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우선 척결의 대상은 국왕과 국정에 대해 광범위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를 갖고 있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이었으며, 그 대상은 점차 신하 전체로 확대됐다.
이와 관련한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였다. 능상의 척결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과 삼사는 수륙재(水陸齋)의 설행, 외척의 임용, 폐모(廢母)의 추숭(追崇) 등 많은 사안에서 충돌했으며, 대신과 삼사의 공방도 격화됐다.  영의정 노사신은 대간의 간언을 거부한 국왕의 행동을 “영주(英主)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했고, 사간원 정언 조순은 영의정의 칭송에 대해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극언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왕과 대신들은 당시의 가장 심각한 폐단이 삼사라는 데 합의했고, 신중히 기회를 노린 끝에 첫 번째 숙청에 착수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자유로운 왕권 행사라는 명분으로, 화려한 연회나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 사냥(다수의 사냥개 사육) 등을 즐기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민심과 민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등 소통부재의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악행과 폭정은 과도한 재정지출에 따른 국가경제의 파탄을 불러 일으켰다. 무오사화 이듬해인 재위 5년부터 세출(20만8522석1두)은 세입(20만5584석14두)을 초과했으며, 재위 7년에는 이른바 ‘신유공안(辛酉貢案)’을 제정, 기존의 공납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민생의 부담과 재정의 유용은 급증했다고 한다.
결국 견제와 비판의 관계에 있던 대신과 삼사가 인식을 공유하며, 심각한 왕권의 일탈에 대해 한 목소리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 같은 능상의 풍조가 삼사뿐 아니라 대신에게까지 만연한 결과로 판단하고, 간접적이며 제한적인 숙청을 보였던 무오사화와는 확연히 다른 규모와 방식으로 더욱 가혹하게 삼사 뿐 아니라 대신들을 숙청하게 이른다. 갑자사화(甲子士禍)다.
당시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된 가운데 사형은 122명으로 절반을 넘을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 영의정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윤필상(尹弼相)·성준(成俊)·한치형(韓致亨)과 함께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어세겸(魚世謙),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 등 당시의 대부분의 대신들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한다.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506년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 박원종(朴元宗)이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킨다.
반정에 성공한 성희안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해 강화도에 안치하고, 다음날인 9월2일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조선왕조 제11대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하다.  박 대통령 비선실세로 인해 발생한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 특수수사본부가 지난 20일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을 사실상 범죄행위가 있는 피의자로 발표한 뒤 여·야 정치권에서 ‘탄핵 추진’ 논의를 본격화 하고 있다.
그 동안 의구심을 가졌던 최측근의 권력형 비리에 ‘대통령이 전반적인 부분에 관여했다’는 검찰조사 결과를 지켜본 국민들은 그야말로 암울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연산군의 치세(治世)속에 빠져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권력의 남용으로, 국정의 농단으로, 소통의 부재로 인해 비리의 중심에 선 대통령이 피의자로 검찰에 입건된,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을 지켜본 국민들은 근본적인 초강도 정치개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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