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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71] 12월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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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71] 12월에 쓰는 편지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7.12.06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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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우리도 그 시간들 속에 피고 지는 꽃이겠지요. 사는 게 다 한 송이 꽃이라면 그리 우쭐할 일도, 기죽어 지낼 일도 아닐 겁니다. 권력도 한 뼘의 햇살보다 귀하지 않을 테고, 부귀도 대지를 적시는 한 줄기 빗방울 보다 낫지 않을 텐데 무어 그리 애면글면하며 살았는지요.-
 

한 장 남은 달력이 바람 없는 방에서 가만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혼자인 달력도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회한으로 남는가 봅니다. 달력도 나처럼 마음을 잡지 못해 스스로 흔들리는 게지요.

흔히들 하는 말로 진달래 개나리 지천으로 피어 시샘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먼 산은 벌써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네요.
 
돌아보면 그날이 그날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고 또 가나 봅니다. 무심한 듯 오가며 꽃을 피었다가는 시들게 하고, 생명을 틔었다가는 거둬들이는 계절의 순환이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서는 세밑의 시간입니다.

우리도 그 시간들 속에 피고 지는 꽃이겠지요. 사는 게 다 한 송이 꽃이라면 그리 우쭐할 일도, 기죽어 지낼 일도 아닐 겁니다. 권력도 한 뼘의 햇살보다 귀하지 않을 테고, 부귀도 대지를 적시는 한 줄기 빗방울 보다 낫지 않을 텐데 무어 그리 애면글면하며 살았는지요. 많은 시간들을 정작 중요한 것을 놔두고 허망을 찾느라 낭비하지나 않았는가 싶네요.

“햇볕 따스한 날 고양이의 털을 손바닥으로 만지고, 바람 부는 들길을 가며 이마의 머리칼을 넘기는 그런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을 우리는 잊고 살았다” 안구로 마우스를 움직여 글을 쓰는 어느 루게릭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어진 시간, 매 순간이 축복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12월의 시간입니다. 달력이 한 장 밖에 남지 않아서 더욱 그렇지요.
 
목필균 시인의 시중에 ‘12월의 기도’라는 게 있어요.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중략)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시를 읽으며 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고, 나의 속 좁음으로 틀어진 사이는 먼저 손 내밀어 화해해야 하겠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되는 그런 시간들로 한 장뿐인 달력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님에게 편지를 쓰는 이 시간도 내게는 축복입니다. 잘 계신지요.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연락도 못하고 살았네요. 그래도 그거는 아셔야 해요. 내가 얼마나 님을 소중하게, 깊이 간직하고 있는지는 말하고 싶어요. 오늘 같은 날 제일 먼저 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특별한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아니예요. 살면서 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빛이 바랜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있잖아요.

소중한 것 일수록 시간이 흐르면 군더기는 사라지지만 알맹이는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지요. 돌멩이가 수많은 시간 속에 닳고 닳아 매끈하고 단단한 수석으로 남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님도 내게 그래요. 이젠 님의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포근한 미소는 윤곽이 없어도 느낄 수 있어요. 님의 미소를 누가 내게서 빼앗아 갈까보아 가슴 저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참, 며칠 전에는 부모님 산소에도 다녀왔어요. 님도 알다시피 부모님이 가신지 벌써 35년이 넘었네요. 두분 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요. 부모님의 얼굴도 님처럼 가물가물해지는데 서러움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지는 것을 보면 자식만 가슴에 묻은 것이 아니라 부모도 가슴에 묻나 봐요.
 
그냥 님이 생각나서 편지를 쓴 거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이런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 해도 12월의 내게는 위로가 되니까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나의 이런 싱거움에 님이 미소지어주었으면 해요.

그리운 님, 오게 될 날들이 더 소중 할 텐데 지난 날이 더 애틋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는 날에는 추억의 발자국이 없지만 지난 날에는 삶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요. 마지막 남은 12월의 시간도 열심히 나의 흔적을 새겨야 할 모양입니다.

오늘은 바람이 무척 차네요. 바람이야 차면 옷을 껴입으면 되겠지요. 하지만 시린마음은 옷으로도 막을 수가 없네요. 그저 오는 날들을 힘차게 밟으며 이겨내야 하겠지요.

님도 어느 날은 가끔씩 나를 기억하나요. 내년에도 삼백예순날의 기억을 모아 편지를 쓸께요. 안녕히 계세요.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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