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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카이사르의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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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카이사르의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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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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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카이사르(줄리우스 시저 :B.C 100~44)는 젊은 시절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대정치가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동맹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인 콘술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스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해 민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기원전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프랑스) 여러지역의 총독이 돼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치러 갈리아를 평정했고, 오랜 갈리아전쟁(B.C 58~50)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 죽자 삼두정치는 붕괴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수스와도 관계가 악화돼 마침내 충돌하게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기원전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을 개시했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추격해 그리스에서 격파했고,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를 쫒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다. 카이사르는  그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해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이사리온을 낳았다.

카이사르는 이어서 소아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Vidi, Vici)"의 세마디로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에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소탕하고 다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5년동안의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종신 독재관에 올라 1인 지배자가 된 카이사르는 로마는 물론 당시 서방세계 전체를 호령하게 됐고, 식민 간척 항만 도로건설 구제사업등 각종 사회정책과 율리우스력으로의 역서 개정등 진정한 개혁을 펼쳐 명성이 높아졌고 칭송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그가 로마의 공화제를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세력들은  비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온 그는 브르투스와 카시우스 롱기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23차례나 칼에 찔렸다. 그 자리에 있었던 브루투스는 갈리아 전장에서부터 그의 심복이자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본 카이사르는 "브르투스 너마저" 라는  외마디 외침을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

거대한 진짜 위기는 항상 정상에 섰을때 오는 법이다. 카이사르는 승리후 주변 상황에 방심한 나머지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끝마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승리만큼 사람을 도취하게 하는 것도 없고 승리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위기는 자만의 빈틈을 노린다. 자신감을 느끼는 것은 성공의 필수요건이지만 성공이 계속되다보면 과욕을 부리게 되고 자만하기 쉽다. 자신감은 절대 필요하지만 적절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자신감과 자만심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국매일신문 전문가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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