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금요논단] 세 여자와 대통령
상태바
[금요논단] 세 여자와 대통령
  • 김연식 논설실장
  • 승인 2021.06.04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식 논설실장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한 사람은 소설 ‘세 여자’에 익숙할 것이다. 소설속의 세 사람은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주세죽(1901년생)은 북한 함흥출신으로 서울과 상해 모스크바 등을 오가며 공산주의 운동을 펼쳤다. 허정숙(1902년생)은 서울과 일본 모스크바 뉴욕 중국 등을 왕래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펼친 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1991년 사망했다. 고명자(1904년생)는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1950년 행방불명 됐다.

이들 세 여성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신여성운동가여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이 집안 학업 등을 포기하고 사상 전선에 뛰어든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음지에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해방을 맞이했고 끝까지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던 여성들이었다. 한 남자의 연인으로, 아내로, 동거인으로, 어머니로 지냈던 이들의 개인적인 삶도 사랑과 갈등이 존재했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사상은 끝까지 고수했다.

세 여자의 주위에는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원조로 불리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우리나라와 중국 소련 등을 오가며 공산주의 운동을 펼친 인물들이다. 충남 예산출신의 박헌영과 경북 김천출신의 김단야, 황해도 개성출신의 임원근 등은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후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등을 만나 부부로 연인으로 지냈다. 물론 소설에는 이들 세 남자와 일부 얽혀 있는 여성의 삶도 있지만 감옥과 도피 등의 생활 속에 피어난 우정과 사랑이었다. 이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는 마르크스 신봉자였지만 대부분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주세죽은 1920년대 경성에서 4대 미인으로 불릴 만큼 미모가 뛰어났으며 박헌영과 결혼해 아이까지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박헌영이 감옥생활을 할 때 고명자의 남편 김단야와 모스크바에서 결혼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박헌영은 북한 정권수립 후 초대 부수상까지 지냈으나 6.25전쟁 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하는 말로를 맞이했다. 주세죽도 젊은 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했으나 첩자로 몰려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결국 1953년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했다.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동료와 사랑에 빠져 아들까지 두었다. 자유연애와 연애 유희론을 구사하면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온 그녀는 연애 자체가 가족과 남성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후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낸 최창익과 결혼해 북한 최고 헌법재판소장 법무상 적십자회담대표 등을 지내다 평양에서 사망했다. 고명자는 해방 후 좌익운동을 하였으나 1950년 2월 경찰에 체포돼 한국전쟁과 함께 행방불명됐다.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었다. 건국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터라 한반도에는 남과 북, 좌와 우가 심하게 대립했다. 당시 미군정이 남한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80%가 공산주의를 선호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한 국민은 20%도 채 안됐다. 뿐만 아니라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도 공산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70%를 넘는 등 좌 편향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원인은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한 국제공산주의 연합인 코민테른의 영향이 컸다.

1919년 러시아에서 창립된 코민테른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의 민족해방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지도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사상교육까지 시켰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하면서 국제공산주의 단체인 코민테른을 자연스럽게 접했다. 해방 후 이들이 건국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우리 국민들은 쉽게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유엔의 감시 속에 자유민주국가가 건국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월북하거나 쫒기는 신세가 되었고, 김일성의 남침으로 공산주의는 남한에서 주적으로 몰린 것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6.25를 겪으면서 피아구분이 분명해졌다. 이들 세 여자도 일부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독립운동가’와 ‘6.25전범’을 명확히 구분해 더 이상 국가유공자에 대한 논란이 없도록 분명한 선을 긋기 바란다.

[전국매일신문] 김연식 논설실장
ys_kim@jeonmae.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