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화의 e글e글] 커피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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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커피 문화사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6.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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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유럽에 전해진 커피는 그 동안 와인과 맥주에 찌들어 있던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각성제가 되었고, 아침에도 맥주를 마실 정도로 술에 취해있던 유럽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커피를 대용 음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점차 이성과 지식을 갖춘 깨어있는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일이 끝난 사람들은 삼삼오오 커피하우스로 몰려들었고 여기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토론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다.

이쯤에서 커피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다. 카미유 데물랭이란 변호사가 ‘카페 드 포아’에서 “무기를 잡아라”라고 한 말에 봉기한 시민군이 파리를 점령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봉건주의 사회가 붕괴되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근세사회로 전환하게 된다.

프랑스혁명을 거친 후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하던 때,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단행한 대륙봉쇄 정책으로 커피의 유입이 끊기면서 유럽은 정신적인 공황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 대용할 음료를 찾기 위한 대용 음료산업이 부흥 했고, “독일의 경우 대륙봉쇄에 의해 발생한 설탕과 커피의 결핍이 독일인을 반 나폴레옹의 봉기로 내몰았고 해방 전쟁의 토대를 마련하는 전기가 되었다” 라고 칼 마르크스가 회고할 정도이니 얼마나 충격이 심했는지 짐작이 된다.

다섯살짜리 루이 15세를 제치고 섭정이 된 오를레앙 공을 비방한 죄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볼테르는 하루 평균 60잔의 커피를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파리의 카페는 지식인과 계몽운동의 후예들로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는데, 1789년 7월14일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페 드 푸아’에서 나온 일단의 프랑스 혁명가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했던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생각 발전소’ 커피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합리한 제도와 국왕의 폭거에 대한 비판 정신을 벼리게 했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논리적으로 말 잘하는 사람이 으뜸이었던 카페 문화는 혁명 정신의 요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유럽의 국왕들은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건너온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며 금지시키고 카페를 폐쇄했는데,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그들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던 것 같다.

1차,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커피 재고를 확보하지 못해 ‘커피, 홍차 및 그 대용품을 위한 전시위원회’까지 만들어 커피 재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연합군의 방해로 커피 공급이 끊기면서 전시하에 독일 시민과 군대를 돌아 흐르던 검은 혈액은 활력을 잃었고 점점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전시에 커피 공급이 끊겨 ‘내가 지금 한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고등학생의 기고문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정도였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유럽인들이 마시는 커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도를 따라 이어지는 ‘커피 벨트’ 지역의 사람들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흑인 노예의 가혹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커피는 아직도 ‘니그로의 땀’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커피의 생산과 소비 구도가 커피 재배라는 가혹한 노동에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과 커피를 마셔 각성함으로써 경제를 움직이고 현대사회를 쥐락펴락 하는 부유한 사람이라는 격차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밤마다 카페를 찾았다는 것은 철학사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인간을 극단의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 실존주의는 토론을 중시하는 커피하우스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르트르의 음울한 실존주의는 노트북과 아이팟의 세계에 몰입한 채 ‘대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스타벅스와는 잘 맞는 측면이 있다. “오늘날 커피하우스는 상호 작용의 장소이기보다는 공동 고립의 장소가 되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물질 가운데 커피만큼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1000여년 전, 에티오피아의 목동이자 시인이었던 칼디가 염소들이 커피나무 잎사귀와 열매를 먹은 뒤 뒷발로 서서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한 이래, 커피는 ‘까만 흙탕물과 만병통치약’ 사이를 오가며 극단의 비난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런던의 여성들은 커피가 자기 남편이나 애인의 생식 기능을 약화한다고 굳게 믿었다.“18세기 말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는 커피가 독약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살인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한 사람에게는 날마다 커피를 마시게 하고, 또 다른 죄수 한 사람에게는 차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두 죄수는 모두 왕과 그들을 관찰한 의사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커피의 여행은 커피 소비의 최상위에 위치한 미국에 관한 사건이다.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영국처럼 차 문화권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처럼 커피 1위 소비국으로 바뀐 것은 18세기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던 영국이 미국에서의 홍차 판매 독점권을 자국의 동인도회사에 주고, 동시에 그 차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 하려고 했으나, 미국인들이 이에 반발에 동인도 회사 배를 급습해 홍차의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가 비교적 연한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진 홍차 맛을 그리워한 탓에 이때부터 홍차에 가깝게 커피를 만들어 마시던 버릇 때문이라고도 한다. 

커피는 활력을 제공하고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정신적인 각성 효과를 제공 함으로써 세계사의 발전과 함께 하면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커피와 차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지지 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국민성이 좌우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 나라에서 불고 있는 커피 열풍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말해 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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