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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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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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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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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보훈청 보훈과 김지수

6월 호국보훈의 달이 지나고 어느덧 7월도 마무리되어 간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은 알고 있지만 7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7월 27일은 정전협정일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정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유엔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이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한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27일에는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한다.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 규슈에 주둔하던 미 24보병사단의 투입이 결정되었고, 24사단의 사단장 딘 소장은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21연대 제1대대 병력과 페리 중령이 지휘하는 제52야포대대의 1개 포대 병력으로 특수임무부대를 구성하여 본대에 앞서 한반도로 먼저 가게 되었다. 이 특수임무부대가 바로 유엔군 첫 전투에 참전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다.

이윽고 1950년 7월 5일, 6시간여에 걸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오산 죽미령 고개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로 스미스특수임무부대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인 죽미령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맹렬한 기세로 남침을 진행하던 북한군의 기세는 유엔군의 참전 이후 꺾이게 된다. 한국전쟁의 전세는 뒤바뀌어, 국군은 38선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등 우세를 보였다가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3년여 간의 전쟁은 휴전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라를 위해 미국, 캐나다 영국 등 16개 국가에서 파병을 하고, 인도, 노르웨이 등 6개 국가에서 의료 지원을 하는 등 총 22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참전을 결정한 나라의 뜻에 따라 전쟁터에 나간 그들은 군인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든든한 부모님이다. 이역 만리 타국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렀다. 

전쟁이 발발하고 71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보다는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더 많아지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국가유공자분들과 낯선 이국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유엔군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따라서, 7월 27일이 어떤 날인지 잊지 않고, 그들의 희생으로 현재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독자투고] 서울지방보훈청 보훈과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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