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열의 窓] 유 선배의 가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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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의 窓] 유 선배의 가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10.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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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가을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지만 가을과 함께 찾아온 가을의 농촌 일은 소나기처럼 들이닥쳤다.

가을의 중턱에서 만난 내 고향 김포 유재철 선배의 말이다. 유 선배는 농부가 꿈이었지만 바늘 하나 꽂을 땅 하나 없어 초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하려고 이력서를 냈는데 오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생각 끝에 해외근로자로 취업을 하려고 시험을 치르는데 강변도로 현장에서 모래 가마니 둘러메고 죽기 살기로 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국내외노동판, 인력시장, 연탄 장사를 거치면서도 농부의 꿈을 놓지 않았던 유 선배는 결국 농업에 정착해 멋진 어마 어마한 농장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력서도 필요 없고 퇴직도 없는 직장을 스스로 만든 유 선배는 올해도 연봉 2억 원의 소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유 선배는 ‘고사리도 제철에 꺾어야한다’며 가을이 오면 어느 일에 먼저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동분서주한다. 농사일은 시기가 있으므로 적기에 해야지 너무 빠르거나 늦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계속 바쁘다 바뻐를 외치는 유 선배의 가을 농사 푸념이 재밌어 소개해 본다. 들깨는 낫질을 할 적마다 쏟아지겠다고 앙탈을 부려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헛농사를 지을 판이다. 밭두렁 묵히는 것이 아까워서 녹두 좀 부쳤더니 풀 속에서 주인 손 기다리느라고 새까맣게 타더니만, 그만 제 성질에 못 이겨서 배배 꼬투리 틀고서 배를 갈라 알갱이를 쏟아 버렸다.

여름내 가꾼 곡식은 가을을 맞아 저 먼저 손(手)달라고 아우성인데, 아내는 도토리 주우러 가자며 산으로 잡아끈다. 대추나무 열매는 기나긴 날 사람 손 기다리며 속 노랗게 태우다가 근심 섞인 주름살만 생겼다. 애간장 태운 그 속도 모르고 사람들은 대추품질 좋다 한다. 백여 그루에 매달린 배들은 판로가 없어 따지 못하고 있으니, 농산물 팔아먹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된다면 논에 고개 숙인 벼의 행색(行色)을 보노라니, 나는 괜찮으니 다른 농산물 먼저 거둬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곡식 중의 맏형 값을 하는 것 같다. 이 바쁜 가을에 벼처럼 속이라도 있는 곡식이 몇 개만 더 있어도 좋겠다.

울타리에 매달린 여주라는 녀석은 가뜩이나 심술 있게 생긴 형색이라 성질 좀 있겠구나 했는데 어느 날 기웃하고 보니 성질 급한 나머지 알맹이들을 후두둑 쏟아낸 뒤였다. 성질 맵고 더럽기는 고추라는 녀석도 한 몫 하는지라, 붉은 고추 다 따서 팔았더니 푸른 고추는 고추 아니냐며 서리 오기 전에 어서 따서 거둬 달라고 맵기 품고 노려보는데 입안이 다 매웠다.

논두렁에 심어 놓은 콩은 속에서 몸 말아 들고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참지를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안달을 하고 있었다. 수수 몇 자루 심었던 것은 바람에 큰 키 내맡기고 흔들거리며 내 차례는 언제냐며 날이 갈수록 수숫대에 핏빛 가득 안고 한을 품고 서 있다.

물이 올라 몸집이 점점 커지던 배추는 제 몸 하나 건사 못하고 겉잎자락 펄럭거리며 속살을 내비친다. 배추 치맛 속 매주어 단속시켜야 한겨울에 덕 좀 볼까 싶어 손이 바빠진다. 서리가 제법 내린다는데 무밭에 비닐이라도 덮어 주어야 배추와 짝 맞춰서 김장할 것 아닌가 싶은데 무는 뿌리 값 좀 하려는지 도통 재촉을 않아 고맙기만 했다.

콩 뛰듯 하는 일덕에 가을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들판은 텅 비어 가며 억새꽃만 바람에 나부낀다. 텅 빈 들판에서 억새꽃을 바라보니 억새꽃 머리를 한 어머님이 생각났다. 올해 내가 가꾼 채소와 곡식의 가지 수만큼이나 할 정도의 십남매의 자식농사를 다 지으시고, 지금은 텅 빈 들판 같은 집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계실 어머님이시다.

십남매의 자식을 키우는 것이 어찌 가을날 열 가지의 곡식을 거두는 것에 비유하겠는가. 어머님의 자식 중에서 혹시나 내가 들깨나 콩 같은 앙탈을 부리며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나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이렇게 속이 찬 낟알이 된 것은 모든 것을 묵묵히 참고 희생하신 어머님의 농부 같은 노력 덕이라는 유 선배. 유 선배의 가을이 그렇게 저물어 간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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