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칼럼] 현대판 ‘과거열풍’이대로 좋은가?
상태바
[칼럼] 현대판 ‘과거열풍’이대로 좋은가?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9.02.14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당시의 과거시험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지금은 그때보다 100배나 많은 유생들이 물과 붓, 짐 따위를 가지고 입장한다. 힘센 무인도 들어가고 심부름하는 종과 술장수도 들어가니 어찌 난잡하지 않겠는가. (…) 이러므로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고나면 머리카락이 허옇게 셀 정도로 피로하다. 가끔은 살상과 압사사고도 발생한다.’ 당시 과거를 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은 조선시대 양반층의 최대목표였다. 한번 입문하면 보통 20~30년간 시험 준비에 매달려 집안의 인맥과 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실상 합격이 불가능했다. 당시 합격자 평균 연령은 30대 중반이었고 고종 7년 정순교는 무려 85세에 합격하기도 했다. 지원자는 많고 관직 수는 한정되다보니 경쟁이 상상을 초월했다.

1800년 정조 24년 3월22일에 치러진 비정기 과거에는 무려 10만3579명이나 참가했고, 제출된 답안지 시권(試券)은 3만2884장에 달했다. 정조실록에 나오는 이 시기 인구가 약 741만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과히 ‘과거열풍’이라 할 만했다. 시험이 과열되면서 ‘수진본’이라는 손바닥 크기의 커닝책이 유행하고, 돈을 받고 대리시험을 쳐주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아예 담 밑으로 구멍을 뚫어 답안지를 전해주는 부정행위도 버젓이 행해졌다.

갑오개혁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열풍이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고시학원과 고시원이 밀집한 서울 노량진 ‘공시생’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가 인기를 끌 정도로 ‘공시족’은 우리사회의 비중있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청년들이 이처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괜찮은 연봉에 비리만 없으면 정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퇴직 후 연금도 국민연금보다 훨씬 후하다. 어느 정도 저녁이 있는 삶도 보장된다. 게다가 희망이 사라진 헬조선에서 그나마 흙수저들이 공정하게 자기 노력으로 승부를 겨뤄 볼 수 있는 것은 공무원 시험뿐이라는 인식도 한몫했다.

지금처럼 취업난이 심화되고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에서 공시열풍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수한 청년들이 꿈과 도전정신을 버리고 공직의 안정만을 선호하는 나라가 분명 정상은 아니다. 경제 활력도, 사회 역동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 공무원 부럽지 않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만이 ‘현대판 과거병’을 치유하는 지름길이다. 물론 우리사회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임금의 양극화, 비정규직 확산, 고장난 교육시스템 등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다.

공시 열풍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공직사회 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경쟁률은 치솟아도 우리나라 공무원이 선진국보다 생산성이 높거나 전문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봉사정신이나 소명의식도 합격점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철밥통, 철옹성, 복지부동 오명을 씻기 위해 공정한 직무수행평가에 따른 퇴출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다. 민간채용을 확대하고 성과연봉제도 도입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얼마전 외국의 한 언론이 우리나라 공무원시험(공시) 열풍을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해당 언론은 한국의 공시 관문 통과가 하버드대 입학보다 어렵다며 젊은이들이 경기 침체 여파를 받지 않는 공공직에 대거 몰린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공시생은 몇 명이나 될까? 지난해 발표된 한 박사 논문은 한국 공시생 수를 약 44만 명으로 추산했다. 공시생 규모가 50만 명에 달한다고 말한 국회의원도 있다. 공시생 44만 명은 만 20-29세 우리나라 청년 인구의 약 6.8%, 2018학년도 수능 응시자의 약 75%에 이른다.

SKY를 나왔든 지방대를 졸업했든 고교 동창들이 공무원 시험장에서 만난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우스개 소리만은 아니다. 외국에서 이색 풍경으로 비춰질 만큼 대한민국 많은 청년들이 공시에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업 안정성이 첫 번째로 꼽힌다. 바늘구멍을 통과해 대기업에 입사해도 정년까지 근무가 쉽지 않지만 공무원은 정년 보장으로 직업 안정성이 뛰어나 몇 년쯤 공시에 투자해도 합격만 하면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정성 선호를 나무랄 순 없지만 우려는 있다. 정권마다 한결같이 규제 개혁을 외치면서도 실질 성과가 부진한 데에는 제도 뿐 아니라 사람 문제가 뿌리 깊다. 직업 안정성을 최고 가치로 공직에 입문한 이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공공기관이 민간의 혁신을 촉진하고 장려하는 매개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공공기관에서 직업 안정성을 중시하는 공무원들이 법적이고 형식적인 자구에 집착하고 매몰될 때 민간의 혁신성은 물거품 된다.

‘심경부주’에 실려 있는 주자의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오로지 과거공부만 하는 사람이 과거에서 써내려가는 답안지를 보면 모두 성현의 말씀이다. 청렴에 대해 논하라면 잘 할 수 있고, 의에 대해 논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스스로는 청렴하지도 의롭지도 않으니, 많은 말을 하지만 단지 종이 위에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청렴도 제목상의 청렴이고, 의도 제목상의 의에 불과하니 모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