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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거목, 巨山 김영삼 영원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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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거목, 巨山 김영삼 영원히 잠들다
  • 박희경 지방부국장, 포항담당
  • 승인 2015.11.24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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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와 역경의 반세기를 우리나라 민주화에 바친 考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벽 미완의 꿈을 남겨두고 영면하셨다.
군사정권으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나라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면서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개혁의 새로운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어느 대통령이고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지만, 군사독재의 모태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사정권의 두 대통령을 구속하면서 새로운 문민정부를 수립했다.
또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군사정권의 검은 돈을 밝혀내기도 했다. 考김영삼 대통령은 또 ‘역사바로세우기’를 실시해 일제 잔재를 철거하고 새로운 민주정부의 장을 열기도 했다.
考 김영삼 대통령 영전에 깊은 애도와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그의 문민정치의 서막을 시작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의 유언에서 ‘통합과 화합’을 역설했으며 전직 대통령으로써 후배 정치인에게 남긴 ‘통합과 화합’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현실정치에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집안싸움을 하는 것을 바라본 그는 '화합'이란 유언을 남기고 떠났을 것이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득표현황을 나타내는 지도는 동서의 색깔이 갈리는 우리 정치사는 조금도 바뀐 적이 없다. 영남은 영남대로, 호남은 호남대로 정치지도는 바뀐 적이 없다.
심지어 외신들은 우리나라 선거를 통해 동서화합도 못하면서 남북통일은 언감생심이라 평하기도 했다. 3김 정치가 마감을 하면서 그들의 대의를 본받는 정치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의 화신'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비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닥쳐도, 그는 항상 한국정치의 한 복판에 서있었다.
1951년 최연소 국회의원서부터 98년 대통령 퇴임까지 47년 동안 그는 정치를 떠난 적이 없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국회에서 쫓아내도, 전두환의 신군부가 자택에 가두었어도 그는 굴하지 않고 버티었다.
YS라는 애칭으로 민주화를 위해 온 몸으로 현대사를 겪었다. 일제의 강점기 시대에 태어났고, 해방된 조국에서 대학에 들어갔으며,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산업화와 근대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그는 9선을 기록했다.
사실상 국회의원으로써 '영원한 기록'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민주화 지도자였으며, 3김 시대의 주역이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가 초산 테러를 당했고, 79년 유신 말기에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말이 이때 남긴 말이다.
80년대 초반엔 신군부가 그의 정치활동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버텼고, 80년대 가택 연금됐지만 민주산악회를 만들고,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다. 결국 85년 2.12 총선으로 야당이 살아났다.
YS는 93년 문민대통령이 됐고 한국정치는 오랜 숙제를 마쳤다. 그의 대도무문(大道武門)의 정신은 그의 앞을 막지 못했다. 그가 민주화 지도자와 문민대통령에만 그쳤다면 절반의 성공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후 YS는 개혁으로 문민정부의 본보기를 보여줬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단행했고,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했으며, 금융실명제로 부패의 중요한 고리를 끊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12.12 군사반란을 법정에 세워 정의를 실현했다. 그는 개혁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많은 지도자가 그러하듯 YS도 그늘과 실패의 기록을 남겼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는 YS는 권력 앞에서 DJ와 분열했다. 두 사람이 합쳤다면 문민시대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1990년 그는 보수 3당 합당을 주도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를 일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로 인해 호남세력과 진보그룹은 사회의 한 구석으로 몰리게 됐다. 지역감정은 악화됐고 이념갈등은 심화됐다. YS의 가장 큰 실패는 1997년 외환위기일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세계화와 금융개혁 그리고 정경유착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에 실패했다. 외환위기는 국민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었고 후유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깨끗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권말기에 들어 닥친 IMF구제 금융과 그의 차남 현철 씨의 비리로 아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다. 우리시대 어느 대통령이고 공과 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투철한 개혁정신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결과를 남긴것 만은 확실하다.
考김영삼 대통령은 26일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민주화의 거목, 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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