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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췌언(贅言)의 언어적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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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췌언(贅言)의 언어적 자격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3.05.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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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역전‘앞’ 같은 ‘쓸모없는 말’은 어떤 쓸모가 있지?

말이나 문장에서 필요하지 않는, 없어도 되는 말이 나오면 (전문가는) 그것이 가지고 있을 법한 언어적 문제를 직감한다.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보도나 출판을 위해 편집데스크에 오른 문장을 교열(校閱)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원칙적으로 ‘틀렸다’고 판단하고 이내 지우거나 바룬다. 

처갓집 역전앞 같은, 하도 많이 써서 언중(言衆) 즉 언어대중의 (친숙한) 입말로 굳어진 것은 못 본채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군더더기 말’이라고도 한다. 처가(妻家)가 아내의 본집, 친정(집)인데 굳이 ‘집’을 붙인다. 정거장 앞 역전(驛前)에 ‘앞’을 붙이면 더 든든할까? 

한자어 췌언(贅言)이다. 췌사(贅辭)라고도 한다. 명사 형용사 등과는 다른 ‘자격’의, 오래된 말이다. 예전부터 이런 말에 관한 의논이 있어온 것의 반증이겠다. 늘 새로 생기기도 한다. 

혹부리영감 할 때의 ‘혹’이란 뜻의 췌(贅)는 비유적으로 데릴사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데려다 놓은, 그런 사위에 대한 ‘처갓집’의 심보가 (원래) 그런 모양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란 말이 늘 나온다. 期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간(期間)의 뜻이다. 期가 ‘때’이니, ‘일제강점기에’나 ‘일제강점 때’로 바꾸는 것이 옳겠다. 요즘 췌사다. 

‘잔해물’도 그렇다. ‘남은 뼈’라는 뜻에서 화재(火災)나 붕괴(崩壞) 사고 현장에 남아있는 부서진 물건들의 몰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고 현장의 부서진 물건’인 것이다. 

殘骸로 충분한 서술(敍述)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요즘 잔해물(-物)이라고들 쓴다. ‘잔해’가 (이러저러한) 물건이니 뒤에 ‘물’을 붙이는 것은 역전에 ‘앞’을 붙이는 것과 같다. 어색하다. 

말(語)이 막히는(塞) ‘어색’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표현이 대개 옳은 표현으로, 또 맞춤법으로 인정된다. 언중 사이 소통의 긴요한 약속이고 법칙일 터다.

자연스럽지 못한 최근 현장언어 사례의 하나로 ‘발인식’을 들 수 있다. 초상(初喪)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이다. 장례(葬禮) 또는 장의(葬儀)의 절차에 따른다. 발인(發靷)은 사자(死者)가 집이나 영안실을 떠나 매장지(埋葬地)로 가는 장례의 절차다. 

인(靷)은 말의 멍에나 소의 안장에 매는 가죽끈이다. 가죽 혁(革)과 끌 인(引)의 합체자(合體字)인 ‘靷’자가 비유적인 뜻으로 저런 엄숙한 상징성을 얻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 어떤 글자를 쓰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이라고 보겠다. 

‘발인’ 자체가 그 의식이다. ‘발인이 오전 7시’라면 그 의식이 그 시각에 시작되는 것이다. 매장지까지의 전 과정이 발인이며, 도중에 의미로운 곳을 지나거나 친지(親知)가 따로 배웅의 자리를 마련했다면 노제(路祭)와 같은 의식이 마련된다.

‘발인식’이 아니어도 넉넉히 ‘발인’의 의미가 되는 것이니, ‘식’은 혹 즉 췌사다. 

그런데 요즘의 여러 변화는 새 형식을 만드는 것도 같다. 언론이 자주 ‘발인식’이라고 쓰니 아예 장례식장에서도 식순(式順)에 발인식이라 쓰기도 한다. 그렇게 올라있는 사전도 있다.

‘말의 원칙’의 결국(結局)은, 대중의 합의다. 모두 그렇게 쓰면 ‘말’인 것이다. 

그러나 기자나 공무원, 작가, 학자 등 언어의 ‘생산자’ 또는 ‘당국자’들은 이런 문제점 또는 논의가 필요한 대목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그들은 언어 ‘소비자’인 일반 대중과는 다르다. 

한국어 정책당국인 국립국어원의 역할도 같은 맥락일 터.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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