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
- 서봉석作
깊게 잠들지 못한다
잠들었다 싶으면 선잠 깨어
벌써 막무가내로 바스락거리는 눈
가위눌린 탓이 아니다
길가로 크게 귀 열린 문풍지를
기다리면 두들리며 가는 바람 탓도 아니고
모진 달빛에 허물어진 별 그림자 때문도 아닌데
사는 날들이 유난히도 뽀송해서
한밤 깊은 적막에도
같이 잠들자고 찾아오는
그리움이 없는 까닭일까
벌써 졸음 자주 놓치는
실없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시인 이오장 시평]
누구라도 붙들고 무엇을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어리둥절하다.
또 무엇을 잘 모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두 물음에 대부분이 자신을 잘 안다 또는 자신을 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아가면서 삶을 개척한다.
모른다면 손대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는 만큼 삶의 질을 높이고 모르는 만큼 얻는 것도 적어진다.
그래서 예부터 ‘배워라, 공부해라, 배워서 남주냐’는 말을 하며 다그친다.
그렇다고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
그런 차이로 의도적이지 않아도 상하가 나뉘어 삶의 환경도 나눠진다.
여기에 탓이 있다.
자신이 몰라서 얻지 못하고 남을 탓한다.
강을 건널 때 배가 없어 못 건넌다.
탓하고 산을 넘을 때도 동행이 없어 못 넘는다고 한다.
잘못된 일이나 부정적인 현상을 야기한 까닭은 모두가 자신의 탓이다.
그러나 한정된 개인적인 일이다.
사회의 공동체에서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면 단합은 없다.
여기서는 탓이 아니라 책임이다.
책임과 탓을 엄연히 다르다.
서봉석 시인은 공동체의 탓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탓을 말한다.
깊게 잠들지 못하는 긴 밤에 감지 못하고 바스락거리는 눈, 길가 쪽 창 문풍지는 바람이 지나가며 흔들고 모진 달빛에 허물어진 별 그림자도 아닌데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사는 동안 유난히도 뽀송하게 보낸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람의 생체는 세포분열이 적어지면서 노화되고 노화된 신체는 정신적인 무력감에 빠져 깊이 잠들지 못한다.
방법은 있다.
노화된 체력으로 그 만큼의 활동을 하면 된다.
그러나 실없는 생각이다.
서봉석 시인은 이점을 알면서도 삶의 한 부분을 지탱하려는 끈을 놓치지 않는다.
노익장은 그래서 필요하다.
[전국매일신문 詩] 시인 이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