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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페스트 와 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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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페스트 와 메르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5.06.11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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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독(病毒)이 전염되는 질환으로 인간과 세균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바로 전염병이다. 이 병을 일명 염병(染病)ㆍ역질(疫疾)ㆍ질역(疾疫)ㆍ여역ㆍ역려ㆍ시역(時疫)ㆍ장역ㆍ온역(瘟疫)ㆍ악역(惡疫)ㆍ독역(毒疫)이라고도 부른다. 소 전염병을 우역(牛疫)이라 하고 인간전염병을 려역이라고 한다. 사람이 갑자기 집단으로 죽는데 그 원인을 모르면 괴질(怪疾)이라고 불렀다. 숙종 3년(1677) 2월 경상도 울산에서 발생했던 괴질이 이런 경우였다. ‘숙종실록’은 이 병에 대해서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은데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가 사나흘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죽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괴질에 전염되어 죽은 자가 열흘 만에 34인이라니 울산 한 지역의 피해로서는 큰 것이었다.더 큰 괴질도 적지 않았다. 순조 21년(1821) 8월 13일 평안감사 김이교(金履喬)가 평양 안팎에서 발생한 괴질로 열흘 동안 1000여명이나 사망했다고 보고한 것이 이런 종류이다. 김이교는 그 증상에 대해서 “토사(吐瀉)와 관격(關格)을 앓아서 순식간에 죽음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김이교는 “의약도 소용없어서 병을 그치게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눈앞의 광경이 놀라고 처참하기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관격증(關格證)’에 따르면 관(關)은 소변을 못 보는 것이고 격(格)은 토하는 것이다. 이 증상은 콜레라인데 이때의 콜레라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같은 해 3월부터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던 홍언모(洪彦謨)는 귀국하던 길인 8월 21일 “연로(沿路)에 운기(運氣)가 크게 유행해서 산해관(山海關) 이남부터 연해안 수천 리 사이에 죽고 상한 백성이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한 데서 청나라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조시대에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서 임금이 정치를 잘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면 군주와 재상들은 전전긍긍하기 마련이었다. 이럴 때 쉽게 사용하는 해결책이 희생양을 만들어 시선을 돌리는 것인데, 서장관 홍언모도 “혹자는 말하기를 ‘이 병의 원인은 남만(南蠻)에서 백련교(白蓮敎)를 배우는 자들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우물에 독약을 풀고 오이 밭에 약을 뿌렸는데, 오이를 먹고 우물물을 먹은 자들이 대부분 죽어서 백 명 중에 한 명도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순조실록’ 21년 8월 17일)”라고 이런 사례를 전하고 있다. 백련교는 송ㆍ원ㆍ명(宋元明)나라 때 성행했던 미륵불을 신봉하는 종파였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일종의 메시아사상으로 현실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의 혁명사상의 일종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여러 차례 큰 탄압을 받았다. 홍언모는 8월초에 난주(?州)에서 몇 사람을 잡아서 수사했는데 샘물로 물증을 삼아서 여당(餘黨)을 체포하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때 유행했던 콜레라는 1817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발생해 1823년까지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까지 유행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이듬해인 순조 22년(1822) 4월까지 계속되어 도성 안팎에서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 사건 발생 90여년 후인 1910~11년에도 만주 전역에 페스트가 만연했다. 당시 서구에서는 페스트균을 쥐가 전파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케임브리지 출신의 중국인 의학자 오연덕(吳連德ㆍ우롄더)은 만주 전역에 창궐하던 페스트가 쥐에 의해서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기침, 재채기, 대화할 때 공기 속에 흩어져 있는 병원체로 감염되는 폐 페스트라고 주장했다. 그 매개체도 쥐나 쥐벼룩이 아니라 산속 바위틈이나 평지에 굴을 파고 사는 마르모트였다. 마르모트 가죽이 피혁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마르모트 사냥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페스트가 사냥꾼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 페스트 전문가 매시니는 “페스트는 공기를 통해 전염되지 않는다”면서 폐를 통해 전염된다는 오연덕의 견해를 반박하고, 하얼빈에 갔다가 감염되어 러시아 철도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1911년 정월부터 시신을 중히 여기는 중국인의 관습을 버리고 오연덕의 견해대로 시신을 소각하면서 페스트가 잡혔다는 것이다. 김명호 교수의 신문 연재 ‘김명호의 중국근현대’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연덕은 훗날 일본 군부가 손을 내밀자 거절하고 말레이시아의 시골 의사로 돌아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메르스 사망자가 잇따라 괴담이 실제 상황이 되었다. 감염환자가 버젓이 중국으로 출국해 중국 네티즌들이 한국을 비난할 정도니 세월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무능이 부끄럽다. 옛 선조들은 이런 재난이 발생하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는데, 우리도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 중세의 흑사병과 같은 재앙은 없겠지만 메르스도 분명 재앙이다. 직접 감염된 사람의 고통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간접고통을 받고 있다. 경기가 얼어붙고 정상적인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지만 메르스도 이번 주를 고비로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메르스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오랑은 공무원의 안일한 초기대응 때문에 폐쇄되었듯, 우리의 메르스도 다름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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