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극기 휘날리며
상태바
[기고] 태극기 휘날리며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6.30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지역농협에 이사 선출이 다가 온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지역농협의 이사직은 직원이 맡아서 하는 일인 줄 알았다. 혹자는 농민으로서 너무 무지한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우리같이 땅만 쳐다보는 농민이 지역농협에서 할 일이란 그저 농약이나 사고 농자재 구임 및 공과금 납부하는 것이 전부였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러하니 그 지역농협에서 잔치가 벌어졌는지 초상을 치르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지역농협을 위하는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몇 년에 한 번 있음직한 조합장 선거 때 투표하는 일이다. 지역농협 안에서 잔치나 초상이 났는지도 모르니 우리 지역농협이 망하는지 흥하는지는 생각도 없이 타성에 젖어서 도장 꾹 눌러 찍고 나오는 것이 내가 지역농협을 위해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누가 조합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뿐인데 무슨 지역농협을 위하는 것이냐고 반문하겠지만 투표율을 높이는 것도 지역농협의 체면 살리는 일 아닌가? 지역농협에서는 나 같이 생각 없는 농민들로 인해서 사업에 차질을 초래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에서인지 지역농협의 살림을 의결하는 이사 선출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하여서 나 같은 단순무지한 사람들의 참여를 원천봉쇄했다.

지역농협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로 미리 대의원이 구성되어서 그 대의원들이 이사도 뽑고 불협화음 없이 세월을 보내어서 이사들도 3~4선의 관록들이 붙었다. 잔잔하기가 호수 같기만 한 지역농협에서 올해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음이 감지되었다. 올해의 이사 선거에 젊은 친구들이 대거 출사표를 던졌다. 우리 동네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듯이 젊은 친구가 재선인지 4선인지의 현 이사한테 도전장을 던졌다. 각 동네마다 그 동네를 대표할 수 있는 이사의 자리는 한 명 몫뿐이었다. 감각이 무딘 내가 보기에도 현 이사가 장기간 이사직에 안주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았다.

투표권도 없는 내가 할 일이란 젊은 친구의 선거운동이었는데 한 동네에서 두 사람이 경합하다 보니 드러내 놓고 유세하기가 눈치가 보였다.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의원들 앞에서 우회적으로 선거운동이라고 한 것이 우리 동네를 대표하는 이사직에 젊은 친구가 당선된다면 이벤트 행사로 우리 집에 태극기를 게양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과연 유재철이다운 발상이라며 나의 국기 게양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라도 그 젊은 친구를 찍겠다는 대의원도 있었다.

지역농협 이사선출이 간선제이다 보니 대의원 아니면 구경도 못하게 하여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투표장에서 쫓겨나와 터덜대고 집으로 향했다. 자기네들이 그렇게 쫓아내면서 나를 보고서는 지역농협에 초상이 났는지 잔치를 치르는지도 모른다고 말들을 해댄다.

대의원선거 결과는 젊은 친구가 재선인지 4선인지의 쟁쟁한 현 이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다음 날 내가 한 말을 실행에 옮기느라 남들은 국경일에도 달지 않는 태극기를 게양했다. 지나가던 아줌마 한 사람이 대관절 오늘이 무슨 날인데 태극기를 게양하냐고 물어봐서 집안일이라고 얼버무렸다. 깃대로 비닐하우스용 철제파이프를 사용하다 보니 워낙 길어서 꼭 판문점 북한 구역의 인공기처럼 높은 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

낮은 들판에서 일을 하는데 이사에 당선된 젊은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이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태극기가 걸렸단다. 태극기 걸린 것을 보았으니 얼른 내리라고 성화다. 이사 떨어진 형님이 알면 국기 게양한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 생길 줄 모르니 얼른 국기를 내리란다. 동네 형님 무서워 얼른 태극기를 하강하란다.

그날 어스름 저녁에 태극기를 걷으며 생각에 잠겼다. 선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혹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태극기를 게양했는데 지역농협에 종사하는 이들이 무지뭉매(無知蒙昧)하다고 평가절하 하는 나는 지역농협의 젊은 이사 당선 축하와 직선제를 바라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한 것이다. 태극기를 게양하며 바랐던 염원이 이뤄진다면 단위농협 이사 선출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화합의 한마당이 될 것인데 아무래도 요원하기 만한 일인 것 같았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