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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사회가 통합을 지향하는 것은 인류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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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사회가 통합을 지향하는 것은 인류의 필연이다
  •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 승인 2022.09.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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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바벨탑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한다. 인간들이 스스로 오만하여져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짓기로 하였는데 신은 인간의 오만함을 벌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결국 탑을 끝까지 쌓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주제는 한데 모여 살던 인간들이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느냐에 있다. 그 이유로 성서에 따르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고 이것이 신의 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역설적으로 인류가 이룬 문명의 힘이 바로 소통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바벨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이다. 세상 최초로 인간이 세운도시는 훗날 바빌론이 되었다. 그리고 〈창세기〉에 따르면 그때 세상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한다. 바벨탑을 신화나 상상 속의 건물로 여길 수 있지만 많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건축학자들은 실재한 고대의 건축물로 믿고 있다. 바빌론은 현대 학자들이 추정하기로 위치가 이라크의 남부지역이라고 추정한다.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된 이라크 우르크는 세계최초의 대규모 건축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바빌론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태동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였다. 이곳에 바벨탑이 세워진 시기는 성경이 쓰여진 시기를 추정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3천4백여 년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 바빌론은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B.C. 587년경 유대인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한 후 지금도 이 지역은 피 터지는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기록물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바빌론은 다민족 국가였다. 이후 형성된 페르시아제국이나 로마·그리스 등의 헬레니즘 국가는 다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상 집단화된 인류문명의 태동은 구석기시대 후반까지 올라간다. 서구사회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생겨난 것은 19세기 전후로 규정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이 혈족과 언어적으로 분명한 예는 인류역사에서 예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지역과 시간에 의해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쉽게 변이한다. 불과 100년 전 구한말에 살았던 사람들과 대화하게 된다면 그것은 현재 남북한의 차이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에게 언어의 통일성이 가능하게 한 것은 고도로 발달된 표음문자인 한글의 존재와 적은 문맹률에 있었다. 인류문명은 오랜 시간동안 상형문자와 표의 문자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이는 인간의 교류와 정보의 교환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서로 다른 어족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이를 통합하고자 하였던 인류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지리적으로 분리된 환경에서는 소리의 전달보다 의미전달의 필요성이 효율적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수용하고 단일 행정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합의 질서는 필연적이었다. 초기 공화정의 합의 제도는 이러한 다양성의 통합 위에 성립된 것이다.

로마공화정의 기원이 다섯 개의 도시국가 연맹체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5부족의 연맹체국가를 기반으로 국가가 성립되었고 그 이전 고조선과 부여의 존재, 삼한의 연맹체는 고대 유목민족의 국가운영방식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의 세 개의 연방국가체계는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그리고 다원주의를 국가경영의 목표로 내세웠다. 그리나 미국의 사회갈등은 현 시대에도 극복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이다. 인종갈등이 근간이 되어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계층 간 갈등은 미국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정책적 한계는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자본권력독점에 있다. 현재의 세계가 프리메이슨, 프리미나티 등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움직인다는 음모론은 미국의 사회구조의 한계와 연관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은 통합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 대립되어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평등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포용해야 하는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인간 누구나가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을 인류에게 요구하고 있다.

통합적 개념은 ‘함께 한다’는 근본적인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이미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오래된 이러한 의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는 인간이 아름다운 사회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평등한 사회는 통합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타인의 자유로운 환경을 보장하는 포용의 정신에서 완성된다. 자유와 평등을 분리하지 않는 생각이 통합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스스로의 자유로움을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는 결국 평등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통합은 인간의 작위적 정치행위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권은 사유재산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원주의의 수용이 인간의 자유로움을 실현하는 기반이 된다는 측면에서 개인의 재산권 역시 공공의 이익의 범위에 한하여 제한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제 치하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우려 했었다. 최근 중국은 지금까지의 소수민족 정책을 버리고 그들의 말과 글을 통일시키려 소수민족의 문화를 탄압하고 있다. 다원주의적 인류역사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그러한 노력은 현재의 우리를 통해 그 실패를 증명하고 있으며 중국의 이러한 행태는 결국 중국을 분열시키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용수철처럼 반발의 힘을 비축하고 있다. 통합의 정신은 단순한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원주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러한 인간의 개성을 인정하여 보장하는 기반 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가 확장하여 문화로 나타나는 현상이 다원주의의 가치이다. 통합의 정신은 인간의 노력과 포용의 정신을 수반하는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공동체 속에 녹아내리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히말리아산맥의 중턱에 자리한 부탄왕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인구가 75만 명인 소국이지만 언어는 무려 24개가 사용되고 있고 라마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다. 부탄왕국의 존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발전이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고 사회갈등의 요소가 우리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문화유입이 자신들의 공동체문화를 파괴할 것이란 사실에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의 부탄왕국이 갖게 된 숙제가 동시에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통합을 전제로 계속하여 발전하여 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 폐허 속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지 않고 지켜온 우리의 공동체주의이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회갈등을 재생산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갈등의 모습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빈부격차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등의 극단적인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불안 요소를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의 평등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 모두에게 최초부터 존재하는 ‘함께 한다’는 본능의 힘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현실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공동체 사회의 덕목은 ‘함께 한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비판에 대한 건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불만과 건전한 비판의 차이를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비판에 대한 건전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자문이 망각되기 쉽다. 건전한 비판은 ‘최선의 선’을 지향하고 있느냐에 있다. 전쟁에 참여하여 적을 죽이는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공공선을 지키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는 ‘최선의 선’을 이루는 덕목으로 자리하게 한다.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 스스로 억압받지 않는 것이고 남을 배려하는 노력으로 공동체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최선의 선’을 이루는 것이고 통합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 된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waterwrap@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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