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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반본(返本) 체덕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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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반본(返本) 체덕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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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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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체덕지’가 원본, ‘공부만 하라’고 뒤집었을까나?

전에 신문에 썼던 글(2018년)을 인용한다. 역사적인 사항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마음’ (a sound mind in a sound body) 익숙한 이 말,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1693년 ‘행복한 세상의 모습’을 묘사한 글의 한 표현이다. 

‘주입식 암기를 피하고, 체육 덕육 지육과 수학적 추리를 강조하며, 소질을 본성에 따라 발전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체덕지의 순서다. 그런데 우리 교육(사회)에서는 순서가 지덕체다. 이 개념,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글(1906년)이다. ‘무릇 교육은 체육 덕육 지육의 3대 기강(紀綱)이 있어야 할지니 ….’ 또 이런 글(대한매일신보 1908년)도 있다. ‘셋 중 (하나를) 취해야 한다면 덕육과 지육을 버리고 체육을 취할 지로다.’ …

저 통찰, 놀랍다. 그러던 것이 언제 어쩌댜 지덕체로 순서가 뒤집어진 것일까? 

혹 서양문물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제(日帝)의 장난일까? 아니면 문과 무 즉 문무(文武) 밖에는 사람의 가치를 매길 이미지가 없었거나 대체할 적절한 개념을 찾기 어려웠던 과거 전통사회의 관습 때문에 순서가 (의도적으로) 바뀌었을까?

서양식 스포츠(운동)의 시범을 보고서는 “종들 시켜서 하지 왜 몸소 저런 (천한) 짓을 하느냐?”고 했다던, 또 운동복 차림 여성의 테니스를 보고 ‘흉측하다.’ 했다던 그 시기의 (신기한)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기억한다. 

그 후 우여곡절(迂餘曲折), 세상의 변화를 겪어내고 우리나라는 오늘에 이른다. 생각하니 ‘지덕체’ 순서는 저 구시대 사고(思考)의 못난 흔적은 아닌지. 과거시험을 넘어서야 ‘사람’ 대접을 받던 진통의 질곡(桎梏)에서 아직 우리는 신음하고 있는 게다. 아니면 지금 정녕 이럴까?

존 로크의 생각은 탁월하다. 지금 (우리에게) 풀어내도 교육의 뜻으로 손색없다. 아마 우리는 그 동안 정신을 제쳐두고, 물질의 풍요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게다.

‘가난을 벗자.’는 일념(一念)으로 사느라 영리한 이가 어진 이를 패고, 약자가 늘 통곡하는 꼴까지 방치했던 게다. 

그러다 약자는 함께 살 이웃이 아니고 멸시받아 당연한 루저(敗者 패자)가 됐다. 기득권은 위너(勝者 승자)로 섰다. 좋은가? 당연한가? 위너의 그 ‘자격’은 누가 준 것인가?

교육을 바로 세우면 기강과 아름다운 마음이 (차츰)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우선 체덕지(순서)의 정신을 되살려 우리의 어린 사람들이 바른 몸(체)과 넉넉한 마음(덕)을 가지고 좋은 공부(지)에 나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증오를 겨루는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을 소외시키는 세상에서 저 혼자 뛰어나서 어찌 기쁠 것인가.

‘행복지수 1위’라고 (주로 서양의) 언론들이 늘 신기해하는 나라 부탄의 경우를 살필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 오래 전에 푸근했던 인정(人情)이란 말이 어디로 어떻게 언제 사라졌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사람의 정은 어버이와 자식 사이와도 같다. 모정(母情)이나 부모 섬김 같은 마음씀씀이가 ‘나(내 새끼) 먼저’의 이기적(利己的) 울타리를 두르며 삭막한 사막이 됐다. ‘경쟁만이 살 길’이라던 ‘지덕체’ 구호의 음험한 모략이려니. 이제 ‘체덕지’ 반본(返本)의 지혜로 우리를 바꾸자.

고운 세상, 본디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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