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마천(司馬遷)이 한(漢)나라 무제 때 쓴 역사책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 反受其殃)’이라는 말이 나온다.
진(秦)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한신(韓信)은 처음에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자 유방(劉邦)에게로 갔고, 이후 승상 소하(蕭何)의 도움으로 한군(漢軍)을 이끌며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제왕(齊王)이 됐다.
전세가 차츰 불리해진 것을 느낀 항우는 사신을 보내 한신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설득했다.
항우의 사신이 떠나간 뒤 천하가 한신의 손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제나라 변사인 괴통이 한신을 찾았다.
괴통은 “저는 일찍이 상법(相法)을 배운 일이 있습니다. 귀천은 골상(骨相)에 있고, 근심과 기쁨은 얼굴빛에 있고, 성패는 결단(決斷)에 달려 있습니다. 왕의 얼굴을 보면 봉후(封侯)에 지나지 않고, 위험이 따라 있으나 등을 보면 귀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맞붙어 싸우고 있으나 모두 결정적인 우위에 설 수 없는 상황이며, 항우와 유방의 운명은 왕의 거취에 달려 있다며, 현재 왕께서 취할 최상의 길은 누구도 편들지 말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두 나라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의 공통된 소망으로,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천하의 기대와 여망은 모두 왕께 모일 것이라고도 했다.
괴통은 “하늘이 주는 것을 갖지 않으면 도리어 꾸중을 받고, 때가 이르러도 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화를 받는다(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고 합니다”며 누구의 편도 들지 말고, 중립을 지킬 것을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괴통의 이 같은 평화적인 계략(計略)을 무시한 한신은 유방을 선택했으나 결국 유방의 부인 여후(呂后)에 의해 참살을 당하게 됐다고 한다.
요즘 더불어민주당의 4·10 총선 공천 파열음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이른바 친명(친이재명계)을 내세운 후보들이 연일 비명계(비이재명계) 현역 의원들의 지역구 출마를 선언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공천 파열음은 감지됐다.
민주당 소속 현직 국회부의장인 김영주 의원이 지난 19일 탈당 선언을 하는 등 친명계와 비명계가 갈라져 연이은 공천자 발표에 집단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지역구에서는 정체불명의 후보 적합도 조사가 이뤄지고, 당 공식조직이 아닌 ‘비선 개입’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이재명 대표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의 현역 의원 하위 평가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이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지난해 9월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파’에 대한 표적성 다면·정성평가가 도마에 오르며, 민주당의 ‘밀실 공천’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4년 의정활동을 평가하면서 국회의원의 일상적인 의정활동이 아니라 이 대표에 대한 ‘충성도’가 잣대로 쓰였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현역 하위 10% 통보를 받은 박용진 의원은 재심 신청서에서 평가 결과에 대해 “시스템의 체계적 해킹”이라며 다면평가·정성평가 기준을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구했지만 당 공관위는 회의도 열지 않은 채 기각했다.
결국, 홍익표 원내대표는 23일 당사에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된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천과 관련한 문제를 공식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 관계자에 따르면 홍 원내대표는 이날 친명계인 김우영 강원도당위원장(전 은평구청장)이 서울 은평을에서 비명계 현역인 강병원 의원과 경선을 치르게 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또, 공천 심사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되거나 현역 의원 평가 하위로 통보받은 의원들의 공개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자신의 지역구가 전략 지역으로 선정, 사실상 컷오프된 노웅래 의원(4선·마포갑)은 당대표 회의실에서 전략지역구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며, “명백한 공천 농단, 당권 농단 직권남용”이라고 주장했다.
대표적 비명계인 설훈 의원(5선·경기 부천을)은 자신이 하위 10%로 통보받았다며, 조만간 탈당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22일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는 노웅래 의원을 비롯, 이수진(초선·서울 동작을) 김민철(초선·경기 의정부을)·양기대(초선·경기 광명을) 의원을 공천 배제한 반면, 친명계로 꼽히는 장경태(초선·서울 동대문을), 박찬대(재선·인천 연수갑) 최고위원은 공천 확정했고, 안규백(4선·서울 동대문갑) 전략공천위원장도 단수 공천됐다.
공관위 결정에 반발하며 탈당한 이수진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표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막말 문자들을 보내고 있다”며 “그동안 민주당은 이재명 강성 지지자들의 막가파식 인신공격으로 국회의원들 대다수가 건강한 비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객관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독재적 당권만 행사되면서 마침내 사당화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요즘 서울 도봉갑에 안귀령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지난해 2월 15일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에서 진행한 ‘외모 이상형 월드컵’에서 줄곧 이재명 대표를 선택한 영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총선 공천 과정을 두고 당 안팎에서 ‘이재명 대표 방탄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서울 도봉갑에 안 부대변인이 전략 공천됐기 때문이다.
안 부대변인은 당시 '외모 이상형 월드컵'에서 ‘이재명 대 문재인’, ‘이재명 대 조국’ 질문에 모두 ‘이재명’을 택했고, 이 대표와 가수 겸 배우 차은우 중 한 명을 택하라는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이재명’을 외쳤다.
안 부대변인의 전략 공천이 결정되자 이 대표의 팬카페인 ‘재명이네마을’에서는 관련 영상을 공유하며, “나랑 보는 안목이 같다”는 등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네티즌들은 “저렇게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해야 공천을 받는구나”, “비위가 사람 비위가 아니다” 등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원 평가 구성에 대해 설명하던 중 “세부 점수를 공개는 것이 타당한지는 공관위에서 자율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며 “심사위원의 의견도 있지만 동료 의원의 평가(도 있다.) 그거 거의 0점 맞은 분도 있다”고 해 논란이 됐다. “기자에게 들은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 대표는 지난달 12일 공관위 첫 회의에서 인사말을 통해 “공정한 공천 관리는 총선 승리의 핵심 열쇠”라며 “공정하고 독립적이며, 투명한 공천관리로 최고의 인재들을 국민께 선보여드려야 한다”고 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춘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이 민주당을 지키는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전국매일신문] 최승필 지방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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