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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우리 삶과 열등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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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우리 삶과 열등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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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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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론인·슬기나무언어원 원장

‘외국인도 보는데’ 남사스럽게 밥은 어떻게 먹지요?

이런 (투의) 황당한 기사를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서울의 명소에서 벌어진 일,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는 서울의 꽤 알려진 매체 중 하나인 중앙일보의 관계 회사 JTBC였다. 

진행자와 기자의 의도가 뭘까. 우리 사는 뜻은 외국인이 보라고 함인가? 체면이 면장인가? 

[‘외국인이 사진 찍고 가’...명동서 쓰레기 홀로 다 치운 사람] 기사, 몇 대목, 인용한다.

<... 먹다 남은, 혹은 다 마신 음료 컵이 변압기 위에 빼곡히 올라 있습니다. 서울 명동에서 ... 한 시민은 온라인에 이 사진을 올리며 "외국인들도 많은 곳에서 이런 예술작품이 ... 외국인들은 명물 마냥 사진 찍고 갔다."고 ... 그는 하나하나 치워보기로 했다는 데요 ...>

외국인이 보고 어떻게 생각할 지에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그 ‘한 시민’도, 이를 기사로 만든 기자도, 진행자도 주목한 것이다. 

‘예술작품’이라는 센스 있는 양념을 바르긴 했지만, 기사의 바탕이 열등감과 체면(치레)의 발로(發露)였음을 짐작 못할 사람은 없다.

50년쯤 전의 풍조(風潮)였다. ‘외국인도 보는데’란 말이 들어가면, 기사가 설득력을 가졌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이나 광화문의 현대사옥 고층건물 불빛이 새벽에도 꺼지지 않던, ‘잘 살아 보세.’ 시절이었다.

보도는, 그 ‘한 시민’이 (변압기 위를 치우는 것을) 마치 국위선양(國威宣揚)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는 얘기를 또 부각(浮刻)시켰다.  

더러운 것, 쓰레기 치우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왠 평지풍파요?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세기 전의 그 마음을 여태 벗지 못하는 게 짠하고, 저런 생각을 첨단 매체에 올려 ‘현대인’들의 생각의 구조(構造)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다만 마음이 차가운 것이다.

뉴욕 파리 로마 홍콩 동경 등 외국은 그러지 않던가? 본 것이 적은 탓이긴 하겠으나, 필자 기억에 ‘그 외국인들’ 사는 곳들도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더라. 다만 싱가포르는 예외일 듯, 그 이유는 대개 아는 바와 비슷하다. 

도시의 모습, 저게 대충 자연스럽다. 좀 빈정거리는 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으로 느껴도 무방하다. 또 잘 치워주셨으니 고맙다. 그러나 청결함을 지키는 것, 그 마음이 좋은 것이지, 외국인들 보는 것이 무섭고 부끄럽고 남사스러워 그랬다면(치웠다면) 참으로 부끄럽다. 

그들 외국인들의 삶의 모습이 우리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되레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기준이 되기도 하지 않더냐. 

서양의 번듯한 문명과 견줘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까? 서양 철학이나 구글 등의 현상에 주눅 들려 우리 삶이 그토록 한심(寒心)하고 초라한가. 그들과 같지 않은(못한) 게 한스러운가?

무자비한 침략과 식민제국주의, 노예 기반(基盤) 경제의 산업혁명이 여태 구미(歐美·유럽과 미국)의 현대사가 누리는 부강(富强)의 바탕이다. 화려한 저들의 ‘철학’도, 저런 바탕을 당연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우월감(優越感)의 산물이다. 

출발선부터 어긋났으니, 과정도 결말도 바를 턱이 없다. 허나 여전히 저들은 우월감에 빠져 산다. 그 결과가 지금 전쟁 등의 모습이다. 기후변화는 우리도 덤터기 쓰니 아니 억울한가.

우리 겨레는 그나마 인류에 대한 경건함을 더럽히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청춘들에게 가만히 묻는다. 저 열등감 또는 열등의식은 과연 타당한가?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론인·슬기나무언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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