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문제열의 窓] 선배. 올해도 열무 심었나요
상태바
[문제열의 窓] 선배. 올해도 열무 심었나요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3.03.30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햇보리가 나올 때는 아득하고 묵은 곡식은 바닥이 났을 때를 말하는데, 시기적으로 밥 반찬거리가 딱 그 짝이 났다. 삼월이면 김장김치도 떨어질 때가 되었고, 설령 손이 커서 김장을 많이 담근 탓으로 김치가 남았어도 군내가 날 시기다. 새로운 반찬이라야 짠지 무나 우려먹든가, 풀포기 겨우 자라는 틈바구니에서 기껏 냉이뿌리나 캐어다 반찬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들판에 비닐하우스가 한둘 생기더니, 이제는 겨울이면 눈 때문만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때문에 들판이 하얗다. 비닐하우스 안의 채소는 묵은 김치를 먹지 말라는지 늘 푸르렀고, 덕분에 농가 수입도 보장해 주었다. 한겨울에 심어만 놓으면 돈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김치냉장고 혁명이 일어났다. 출시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냉장고가 있을 때만 해도 채소 값이 심하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먹는 김치가 반이면 쉬어서 버리는 김치도 반이나 되었다. 이제는 버리는 김치도 없고, 사철 싱싱한 김치가 끊이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채소의 소비량도 현저히 둔화됐다.

쌀농사만 하던 논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한 뒤로 봄이면 비닐하우스 안에 열무가 가득 찼다. 열무 한 관에 삼천 원이 넘던 것을 생각하니 열무이파리가 돈으로 보였다. 20년 전에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은 열무 값 폭락으로 누구 하나 선뜻 열무를 심으려 하지를 않는다. 하지만 농사라는 것이 파종과 수확시기를 놓치면 폐농이라, 울며 겨자 먹는 것이 아니라 울며 열무를 뽑아야했다.

열무 값 폭락으로 시장에서도 제발 열무를 출하하지 말라고 아우성이었다. 급기야 시청이나 농협 등 유관단체에서 열무 팔아 주기운동까지 벌였지만, 지천이 열무로 가득 찼다. 내 집에서 대우 못 받는 물건이 남의 집에서는 누가 좋아할까 싶어서 선뜻 남 주기도 곤란했다.

전문가들은 농산물의 수요탄력성이 비탄력적이라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내림에 따라 농산물 수요량이 그에 맞춰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정론을 펼친다. 쌀값이 내렸다고 밥을 두 공기 먹거나 쌀값이 올랐다고 반공기로 줄이지는 않는다는 논리다. 특히, 열무는 계절성이 있고 저장성이 낮아 조금만 과잉 생산되면 가격은 한없이 추락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 동네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옆집 선배가 열무를 빨리 수확하고 2모작으로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걱정이 돼 잠을 못 이룬다는 것이다. 내가 선뜻 나서 열무 50단을 십 만원을 주고 샀다. 열무 값이라며 십만 원 주는 것을 안 받으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선배가 그 돈으로 읍내 장터 집 가서 대포나 들이 키자며 지인들 끌어 모았다. 다섯 명이 모여 앉아 취중에 농정을 성토하고 농사꾼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나오는데, 그동안 마신 술값이 십오만 원이라 하여 돈 오만 원을 선배가 더 보태 냈다.

열무 팔아 돈 좀 마련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에 농협에서 열무봉지 사고, 저울까지 빌려다 놨는데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기여코 남은 열무를 갯가에 버렸다.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 열무를 쇠스랑으로 찍어 내리고, 발로 질겅질겅 밟았다. 쇠스랑에 찍히고 발에 밟힌 열무는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 죽어 갔다. 말은 죽으라고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선배의 속마음인가 싶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다고 했다. 농사꾼은 자기가 심고 가꾼 농산물이 자식이 아닌가 싶다.

겨울에 씨를 심고, 눈이 오면 쓸어내리고 눈 녹은 물을 도랑을 파서 흘러내려 가게하면서, 자식 같은 열무는 찬바람 쏘이면 안 되는 줄 알아서 한겨울 추위를 몸으로 다 막아 주지 않았던가. 바람 불면 비닐 날아갈까, 날이 더우면 데일까, 애지중지 키운 자식인데 화도 나고 서글픈 마음에 말은 죽으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선배는 울고 있었다.

선배는 들판을 오가며 자식 같다던 열무를 쏟아버린 곳을 안 본다고 하면서도 자식 무덤 보는 부모처럼 힐끗거리며 보기도 했다. 선배가 버린 열무는 날이 갈수록 햇볕에 마르고 바람에 날리면서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열무 안 심겠냐구요. 자식 죽었다고 자식 안 낳으려는 부모 봤습니까. 농사꾼이라면 자식 낳는 심정으로 또 심어 봐야지요. 선배. 올해는 잘 될 거야요.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