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강상헌의 하제별곡] 세월교의 풍류학
상태바
[강상헌의 하제별곡] 세월교의 풍류학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3.05.09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우리 이름’의 해맑은 아름다움을 되찾는 길

대교(大橋)라는 획일적인 이름 말고 ‘세월교’라 부르는 다리가 있다. 비 많이 오면 넘치기도 하는, 작은 강이나 개천의 다리다. ‘어떠어떠한 다리’를 이르는 것이니 일반명사다. 

전에 ‘미디어오늘’에 어문(語文)칼럼 ‘말글바다’를 연재하며 이 다리의 이름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방송(KBS)이 ‘뉴스9’(2014년 8월)에서 洗越橋라는 한자까지 화면에 내며 썰 푸는 것을 ‘개구멍 언어’라 꾸짖고, 본디를 따져 물었던 것이다. 

서울 성동구의 살곶이다리나 충북 진천 농다리, 강원도 영월 동강둔치의 섶다리 등 그럴싸한 이름 가진 오래된 다리 말고 마냥 세월교라 불리는 다리가 곳곳에 있다. 세월교의 ‘정의’도 대충 정리한 그 보도, 인용한다.

<…계곡을 건너던 차가 급류에 쓸려 일가족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는데요. 그곳은 하천 바닥에서 1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시설물입니다. 다리도 길도 하천보(河川洑)도 아니면서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이런 통로를 세월교라고 부릅니다.>

독섬은 돌섬(石島 석도)이다. ‘독’은 ‘도팍’ 등과 함께 돌맹이의 남해안 지역어(語)다. 울릉도 곁, 우람한 바위섬이 ‘외로운 섬’ 독도(獨島)라는 엉뚱한 문패를 달면서 국토 동쪽 바다 한국해(韓國海)는 애상조(哀想調)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의 이미지를 보듬게 됐다.  

원래 이름을 한자로 바꿔야 했던 상황, 이유 없는 무덤이 있으랴. 허나 본디를 잃고 ‘외롭다’ 타령으로 온 겨레가 한국해의 돌섬 독도를 상상하면 옳은가? ‘세월교’도 이와 비슷하다.

KBS가 신문사에 ‘관행적으로 洗越橋라 쓴다.’며 항의했다. 그런 관행 없다, 옳지도 않다, ‘항의’에 적절히 응답했다. 내력과 원리를 추가로 얘기할 생각이었으니 어쩌다 잊었다.

洗越橋 말고도 歲月橋 洗月橋 등으로 (친절하게) 한자도 넣은 글이 시중에 여럿이다. 넘치면 물이 다리를 씻으며 넘어간다(洗越), 세월(歲月)이 간다, 물이 달(月)을 씻어준다(洗) 따위의 시적(詩的)인 이미지도 붙어있다. 이를테면 ‘세월교의 풍류학’인 셈이다.   

경기도 양평에는 세월리(洗月里)라는 강변 마을이 있다. 이런 짐작에는 의당 개연성(蓋然性)이 있어야 한다. 세월교 된 사연이 없지 않을 터다. 제대로 된 풍류(風流)가 필요한 것이다. 

사물의 토박이 이름에 해박했던 뿌리깊은나무 한창기 선생이나 우리 땅의 제 이름 톺아내기에 평생을 건 윤여정 선생(나주문화원 원장)에게서 지혜를 구할 대목이리라. 한 선생은 이미 고인(故人)이니 선택은 윤 원장 뿐일세. 바로 응답이 왔다. 

“원래 이름 중에 그런 비슷한 이름 많아요. 아마 ‘사이여울’이나 ‘새여울’ 쯤에서 생겨서 번진, 유식(有識)한 체 하는 이름이 ‘세월’이겠지요.”

마을과 나루터들 사이(間 간)나 계곡 틈새 개천의 여울에 지어진 허름한 다리가 ‘사이(새)여울다리’였겠다. 한자말로 옮기기 위해 ‘세월교’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보자. 상황에 맞춰 그럴싸한 한자가 동원됐으리라. 독섬(돌섬)이 홀로 獨자 독도(獨島) 됐듯이.

남이 어딘가에 올린 (그나마도 다른 이의 표절 글 옮긴) 글을 생각 없이 베끼면 큰 코 다친다. 그 망신을 언제까지 감수할래? 심지어 이런 설명도 있다.

‘세월교(洗越矯) ... 흄관(hume pipe)과 시멘트로 간이적으로 만든 소규모의 교량을 뜻하며...’ 게다가 다리(橋 교)가 교도소(矯導所) 이름인가? 블랙코미디로 국민을 즐겁게 하려는 경기도 구리시의 배려라고 ‘즐감’해야 하나. 

생각을 해야 본디가 보인다. 챗GPT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겠다. 예쁜 우리말도 살리자.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