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팜유 생산국인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을 중단한 데 이어 세계 2위 밀 생산국인 인도가 밀 수출을 중단하는 등 주요 곡물 생산국들의 식량 보호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국제 곡물 가격 폭등 여파로 자국 내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품귀 현상마저 빚어지자 ‘자국 우선 공급’이라는 긴급 처방에 나선 것이다. 따라서 곡물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으로서는 식료품 물가 부담이 더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식량 확보마저 걱정해야 할 최악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곡물자급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최하위인 우리나라로서는 식량주권을 지킬 대책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곡물자급률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2000년만 해도 30.9%였지만, 정부가 식량안보를 정책 후 순위에 둔 탓에 2010년 25.7%로 떨어진 데 이어, 2020년 19.3%(유엔 식량농업기구 집계 기준)까지 떨어져 역대 최저 수준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시장에서 밀, 옥수수, 팜유 등의 수급 차질이 빚어진다면 우리나라는 곧바로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주요 7개국(G7·Group of Seven·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등 서방 7개 선진국)이 인도의 이러한 수출중단 조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식량 보호주의의 거센 물결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산물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세계 각국은 “우리부터 살고 보겠다”라는 극단적 ‘자국 이기주의’ 행태를 보이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사상 최고치 수준인 국제 곡물 가격을 추가로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의 밀 수출금지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인 지난 5월 15일(현지 시각)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밀 선물가는 한때 5.9% 급등해 2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세계 곡물가격지수는 올해 3월 170.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평년 수준보다 70%나 오른 것이다. 인도가 세계 밀 수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 정도로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식량 위기가 가중될 가능성을 높여 시장이 받은 충격이 컸다.
국제 곡물가 상승은 각종 가공품·사료 가격과 밥상 물가를 자극해 경제난을 가중하게 된다. 국제기구들이 잇달아 식량 위기를 경고한 가운데 자국 식량 보호를 앞세운 인도의 밀 수출금지는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금지 등과 함께 국제 식량 보호주의를 더 자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관련 수출 제한 등에 나선 국가만도 30여 국에 이른다. 국제 밀가루 가격이 치솟자 심지어 이란에서는 빵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까지 번지고 있다. 식량 무기화의 급속한 현실화로 수입국들은 심각한 ‘식량안보(Food security)’ 위기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식량(Food)은 무기(Fire), 연료(Fuel) 등과 함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국가안보 필수 3F’로 불린다. 1991년 소련 붕괴의 결정적 요인은 미국 등 서방 사회의 식량 봉쇄였다. 미국 등의 곡물 금수조치로 1,700만t의 밀과 옥수수 공급이 막히는 바람에 결국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말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식료품 부족에 따른 가격 폭등으로 붕괴 직전까지 갔다. 대부분 국가는 2007∼2008년 세계적인 식량 위기를 겪으면서 식량안보를 자국의 헌법이나 법률에 반영해 지키고 있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5.8%, 곡물자급률은 20.2%(사료용 포함)에 불과하다. 쌀은 92%에 이르지만, 쌀을 제외하면 3.2%에 불과한 탓이다. 특히 밀의 자급률은 0.5%, 옥수수의 자급률은 0.7%로 국내 공급능력이 제로(0) 수준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세계 7대 곡물 수입국으로서 세계식량안보지수는 점점 낮아져 지난해 순위는 32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기초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데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는 말로는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외치며 식량자급률 향상을 강조만 했을 뿐, 실제 자급률은 오히려 더 떨어져 사실상 헛구호에 그쳤을 뿐이다.
한국은 공산품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농업의 가치를 등한한 탓에 정책 우선순위에서 농업을 항상 뒷전으로 미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요가 많은 밀, 콩, 옥수수 등 전략 작물의 자급률은 그야말로 미미하다. 국산보다 훨씬 싸다는 이유로 수입 물량 의존도를 지나치게 높여온 결과다. 새 정부는 ‘식량주권 확보’를 국정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2027년까지 밀의 자급률은 7%, 콩의 자급률을 37%까지 늘리겠다고 제시했다. 반드시 실천해야만 한다.
곡물은 하루아침에 생산 기반을 늘리고 자급화를 실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반도체로 식사를 대신할 수도 없다. 우선 현 위기가 ‘식량 대란’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비상 수급 계획을 세우는 등 시나리오별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수입선의 다변화와 함께 곡물 수입의 안정성을 높이는 한편 10% 안팎에 머물러 있는 주요 곡물의 평균 재고율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권장 비율인 18.0% 이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또한, 쌀 중심의 식량비축제도를 밀·옥수수 등까지 확대하고, 안정적인 수입 유통망 확보를 위해 국제메이저급 곡물 수입업체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쌀 대신 밀·콩 등의 생산을 늘리는 등의 기초식량의 국내 생산 확대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도 서둘러 펴야 할 것이다. 곡물자급률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예산 책정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이행을 강제해야 한다. 더불어 수매 정책지원 강화와 주요 식량작물 별도 직불제 등을 통해 자급률이 낮은 주요 곡물의 국내 생산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영국 런던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노먼 딕슨은 ‘군사적 무능의 심리학’을 통해 무능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휘관의 무능은 무지가 아니라 잘못된 판단을 고집하는 심리적 기제에서 비롯된다. 지휘관이 ‘약한 자아’를 가지는 경우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기 쉽고, 이 성향은 자기를 과신하고 타인의 의견을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과 대(對)러시아 방어전을 지휘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의 행동을 보면 두 가지 교훈이 읽힌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의 ‘결단’과 ‘용기’이다. ‘결단’과 ‘용기’는 지도자의 기본자질이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박근종 성북구 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