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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문일지십 然(연)의 마법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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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문일지십 然(연)의 마법 (下)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3.11.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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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누가 정의이고 누가 不義인가-불연기연의 잣대로 보자.

不然其然(불연기연), ‘그렇지 아니함[不然]이 그러함[然]’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이 말은 알쏭달쏭하다. 아닌 것과 그런 것이 같다니, 풀어보니 더 아리송하구려. 

늘 염두(念頭)에 두고 살다보면 ‘이거다’하며 무릎을 탁 칠 때 있으리라. 겨레 종교 천도교의 특징적 어법 또는 논리로 종교 뿐 아니라 철학과 명상의 언어로도 자주 활용된다.

조선 철종 14년(1863) 종교사상가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실린 말이다. 사전은 ‘사회 규범(規範)이나 자연 현상 또는 일상적 현상의 궁극적인 실재(實在)가 무엇인지 궁리하는 말’이라 풀었다. 또한 아리송하다. 그러나 참고삼을 수 있겠다. 

然은 ‘그러하다’의 뜻인가 하면 ‘그러하나’의 뜻으로도 쓰인다. 옛말 투 ‘연이나’라는 말은 ‘그러나’의 뜻이다. 혹 글자 자체가 그런 ‘모순적’인 활용법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일까. 

개[犬 견] 고기[⺼ 육(肉)] 불[灬 화] 이미지 합치니, 저렇게 개념적인 또는 철학적인 뜻으로 전용(轉用)되는구나. 이런 화려한 변용(變容)에 정작 이를 만든 갑골문 사람들도 당황하겠다. 

원래의 의도인 ‘불에 (개고기를) 그을(슬)다.’라는 말을 만들기 위해서 然에 불[火]을 덧대 燃(연)을 만들었다. 灬와 火, 불의 이미지가 겹쳤다. 灬는 (새 글자를 만들기 위한) 구성요소로 쓰려고 火를 점 4개로 바꾼 것이다. 연소(燃燒)는 ‘불이 붙어 탄다.’는 뜻이다.

‘그러하다’의 뜻으로 자연(自然 네이처)의 핵심요소가 된 그 글자 然에 불[火]이 붙으니 산불처럼 (자칫) 자연이 망가지는 상황이 됐다. 

문자(文字)라고도 하는, 한자 만드는(구성) 방법 중 하나다. 한자가 그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不然其然의 명상이 더 의미로울 법하다.

생각하는 독서와 글쓰기 또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한 생각은 세상을 이끄는 지도력의 (확실한) 바탕이다. 저 무지막지한 망나니들 날뛰는 것은 이 바탕을 가지지 못한 까닭이리라. 

사리(事理)의 바탕은 ‘생각’이다. 디지털 문명의 복제(copy) 만능(萬能) 등의 특성, 특히 인공지능(AI)의 최근 기세(氣勢)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각’을 이길 지혜나 방법론은 없다. 

디지털리즘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소박한 말이지만 착한 생각은 인간에게, 인간의 문명과 전통에게, 생명에, 우주의 무한(無限)에 겸허한 경건함을 안기는 진리일 터다. 

더 살펴보자. 주류 문명이, 특히 개인과 세상의 평화를 희구한다는 명분(名分)의 종교가 (결과적으로) 늘 전쟁과 혐오로 살육과 파괴를 부르는 모양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의라며 서로를 원통하게 하는 전쟁, 그 갈등의 본디가 뭔가. 하잘 것 없는 그 꼬투리에 허허로운 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사람’을 지운 터전에서 ‘사랑’이나 ‘진리’를 간구(懇求)한다는 그따위 몰상식이, 문명이고 종교인가? 이념(이데올로기)은 무슨 소용인가. 사기(詐欺)겠지.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들이 계란 한 알을 상하로 또는 양옆으로 세우는 것을 서로 ‘정의’라며 치고받는 얘기로 세상을 조졌다. 개그에 불과할까?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를 코미디로만 읽고 마는 세상은 아제개그 상황 아닌지. 

저 서양 작가들은 (결과적으로) 동양의 주제 ‘불연기연’을 설파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바꾸면, 내가(나만이) 옳다는 집착을 버리면, 然이 불연(不然)인지 연(然)인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으리.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to be, and not to be) 마법의 然이다. 

해원(解冤)이 필요하다. 해원의 冤은 冖(멱·그물)에 잡힌 兔(토·토끼) 그림이다. 토끼의 빨간 두 눈을 상상하자. 거대한 원혼 그룹들의 전쟁의 시대다, 누가 저 비를 멈출 것인가?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언어철학자·시민사회신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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