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문제열의 窓]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같은 고장 울진을 다녀와서②
상태바
[문제열의 窓]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같은 고장 울진을 다녀와서②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2.09.22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7월 23일 토요일. 파도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쟁반처럼 솟구치는 동해의 일출은 장엄했고 바다는 더 드넓게 보였다. 아침 8시 죽변항에서 칼칼한 곰치국에 밥을 먹고 근남면 성류굴로 출발해 9시 30분에 도착했다. 성류굴은 공룡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알려진 시기인 2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천연석회암 동굴이다. 담홍색과 회백색 그리고 흰색을 띠고 있다. 지하 자연조형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일명 지하금강이라고 불린다. 외부 암벽에 있는 울창한 측백나무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굴은 해발 약 20m에 위치해 있다. 총길이 870m의 동굴은 50만개의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鐘乳石),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石筍),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石柱)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지하궁전과 같이 화려하다. 동굴 안에는 왕피천과 통하고 있는 12개의 광장과 수심 4~5m의 물웅덩이(池)가 5개 있어 물고기는 물론 박쥐·곤충 등 54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성류굴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임진왜란(1952) 때 생겨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굴 앞의 사찰에 있던 불상을 이 굴속에 피난시켰는데, 여기서 ‘성불(聖佛)이 머물렀던(留) 굴’이라고 ‘성류굴(聖留窟)’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부처님 세 분이 일렬로 서 있는 듯한 삼불상이 특히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는 주민 500여명이 왜적을 피해 이 성류굴로 피난했는데, 이를 탐지한 왜병들이 동굴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 죽는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성류굴을 벗어나 11시쯤 금강송면(金剛松面) 불영사에 도착했다. 금강송을 비롯해 참나무, 소나무 등이 빼곡하게 들어선 그늘진 길을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그냥 힐링이 됐다. 마스크를 벗으니 상큼한 나무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부처바위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 하여 불영사(佛影寺)라 했다. 불영사는 여성 스님들만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조선 태조 5년(1396)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소운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1500, 1568, 1603~1609, 1701, 1721, 1899~1906년에 중수(重修)가 있었다. 절 입구에 스님들이 공양음식재료를 키우는 채소밭을 보니 정겹다. 절 마당의 연못에는 수련이 가득했다. 또 약수터가 있어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불영사가 있는 금강송면 하원리에서 근남면 행곡리까지 13km에 이르는 곳을 불영사 계곡이라 한다. 기암괴석과 깎아 내린 듯한 절벽, 맑은 물줄기, 울창한 숲이 어울어진 계곡이다. 여름에는 계곡 피서지로, 봄가을에는 드리이브코스로, 겨울에는 설경이 빼어난 곳으로 사계절 언제나 찾아도 좋은 곳이다. 계곡 곳곳에는 우람하고 오래된 붉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의 신비한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깊은 계곡이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오후 1시가 되었다. 주차장에 위치한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기로 했는데 식당이 휴업 중이었다. 마침 동네할머니들께서 손수 수확한 수박과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싱싱한 수박을 한 통사서 옥수수와 함께 배불리 먹었더니 점심생각이 없어졌다.

이어 금광송면 소재지로부터 1시간을 달려 왕피리(王避里) 끝자락 양지마을을 찾았다. 하늘다람쥐가 곳곳에 나타났다. 정말 심심산천(深深山川)이었다. 양지 마을은 명인 고화순씨가 태어난 곳으로 생후 8개월 때 매화면 매화마을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명인의 부모님께서는 이 산골 마을에서 고사리, 취나물, 두릅, 쑥, 백도라지 등 산나물을 뜯어 울진 5일장과 매화 5일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높은 고개를 넘나들어 20km나 되는 거리를 머리에 이고 어깨에 져가며 5시간 이상을 걸어 읍내 장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는 차도 없었지만 언덕이 너무 높고 많은데다 좁고 험난하기까지 해 손수레조차 끌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왕피리는 한반도 남쪽의 마지막 오지(奧地)로 불린다. 오지 중의 오지로 이름나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접근이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다. 서쪽으론 통고산(通古山;1,066m), 동쪽에는 대령산(大嶺山;652m], 북동쪽에는 천축산(天竺山;653m) 등 높은 산맥으로 첩첩 쌓여 있다.

이 때문에 전쟁이나 국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왕피천이라는 이름도 ‘왕이 피신해온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935년경 신라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가 손씨 모후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 왔다가 모후가 이곳에서 별세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1361년 원나라 말엽 홍건적이 결빙기를 이용하여 남침해 고려 31대 공민왕이 피신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피리는 ‘왕피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돼있어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 울창한 숲 사이를 채우는 빛줄기, 은밀한 소나무향, 귓가에 맴도는 산새 소리에 세상 시름을 잊게 된다. 왕피천 계곡의 물은 1급수여서 은어, 쏘가리, 산천어, 참게, 꺽지 등이 서식한다.

왕피리 100여명의 주민들은 벼, 고추, 감자, 야콘과 고랭지 채소인 배추 등을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기농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이들은 천연 농법에 의한 영농을 추구해 왔다. 마을 밭에서 이뤄지는 유기농 농법은 미생물 퇴비를 사용해 농사를 짓고, 논에 제초제 대신 우렁이를 풀어 잡초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지나는 길에 금강송면 ‘소광리 금강송(金剛松)군락지’를 들러 보았다. 백두대간 금강산을 비롯해 태백산맥 일대에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를 ‘금강송’이라고 한다. 붉은색이 감도는 금강송 위용에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나무의 가운데 부분인 심재가 워낙 촘촘해 수명이 길고 뒤틀림이 없다고 한다. 유난히 붉은 빛을 머금은 채 곧고 높이 자라는 게 특징이다.

금강송면 소광리는 국내 자생 금강송의 최대 군락지다. 1500여㏊ 금강송 군락지는 수령이 520년에 달하는 보호수 2그루와 350년 된 미인송도 1000여 그루 이상 있고, 100~200년가량의 금강송 8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2015년부터 지역행정 명칭도 울진군 서면(西面)에서 ‘금강송면(金剛松面)’으로 바뀌었다. 군락지 입구에는 조선 숙종 시대 새긴 입산금지 표지석이 남아 있어 이곳이 얼마나 중요하게 관리돼 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울진․봉화 등지에서 자란 금강송이 춘양역을 통해 운반됐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궁궐에서 사용됐다고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불린다. 황장목은 ‘누런 창자 나무’란 뜻으로 수령이 120년 넘는 반듯하고 속이 단단한 소나무를 이른다. 임금의 관을 만들거나 궁궐용 목재로 쓰였다. 울진 금강송은 2001년 경복궁 태원전 복원 사업, 2004년 양양낙산사와 2008년 숭례문 화재 복원에도 사용됐다고 하니, 가히 ‘역사의 파수꾼’으로 불릴만하다.

소나무는 문화적 향기와 여운을 가득 지니고 있다. 송성(松聲)과 송도(松濤)는 소나무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이다. 송영(松影)은 달빛 아래 소나무의 은은한 그림자이다. 송창(松窓)은 소나무 그림자가 비치는 창문 또는 소나무가 한폭 그림처럼 보이는 창문이다. 송애(松崖)는 소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절벽이다. 송계(松契)는 양켠에 소나무가 울창한 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을 일컫는다. 이런 말들은 모두 세속을 떠난 탈속의 경지와 풍류를 일컬을 때 사용한다. 시와 문학, 붓과 그림 등 예술창작활동에 빠지지 않는 소재다.

지난 3월 발생한 경북 울진, 강원 삼척 등 동해안 지역의 산불로 온 국민이 애를 태웠다. 울진에서만 1만 4701ha 규모의 산림이 불에 탔다. 무려 축구장(0.714㏊) 2만590배에 이르는 면적이다. 다행스럽게도 소방헬기를 집중 투입해 불길이 금강송 군락지로 번지지는 않았다.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다.

오후 2시 30분 울진을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꿈같은 1박 2일. 아름다운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울진은 산림이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지역이다. 과거에는 강원도에 속했으나 1963년 경상북도로 편입됐다. 2개의 읍과 8개의 면으로 행정구역이 구성되어 있고, 총 989㎢의 면적에 4만7천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면적의 85.5%가 임야이고 농업과 어업을 겸한 농산어촌지역이다.

112Km의 해안선과 함께 펼쳐지는 청정바다와 은빛백사장, 송림풍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천혜의 동해안 최고 관광지이다. 관동팔경의 대미를 장식할 울진이다. 천연온천욕과 산림욕,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사계절 휴양지이다. 때 묻지 않고 자연과 벗 삼아 잘 보존되어있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환경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지역특산물로는 울진대게, 울진송이, 울진고포미역, 산나물 등이 유명하다. 울진대게는 속살이 쫄깃하고 맛이 담백하여 궁중에 진상되어 왔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평해군과 울진현편에 지역특산물로 자해(紫蟹)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줏빛이 나는 게라는 뜻이다. 대게라고 불리는 것은 게가 크다는 것이 아니고 다리모양이 대나무처럼 곧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울진송이는 동해의 깨끗한 바람과 금강송을 키워 내는 울진의 울창한 송림에서 생산되어 표피가 두껍고 향이 진하고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는 최상급 자연산 송이다. 소나무의 잔뿌리에 공생하면서 자라는 버섯이다. 죽은 소나무 밑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반드시 병충해가 없고 생육이 좋은 소나무에만 붙어서 산다. 종균에 의한 인공재배가 곤란해 자연에서만 채취된다.

울진고포미역은 지역특성상 인근의 민물이 유입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청정 해역에서 생산된다. 고려 때부터 품질을 인정받아 왕실에 진상되던 특산품이다. 물살은 급한 반면 수심이 얕은 곳에서 햇빛을 보고 자라서 질과 맛이 우수하며 잡벌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미역국을 끓이면 푸른빛과 향기가 되살아나며 임산부들이 해산 후 삼칠일 동안 이 미역국을 먹으면 피를 청결히 할 수 있다고 하여 애용된다.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고화순씨와 함께한 이번 울진 여행으로 울진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됐다. 내년에는 온정면에 소재한 백암산을 등반하고 천연온천인 백암온천을 가봐야겠다. 이어 배롱나무꽃길을 따라 평해읍 월송정을 찾아 앞의 넓은 청정바다와 은빛 모래사장에서 청춘으로 돌아가는 낭만의 꿈을 꾸련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